인격 살인  

 

인격살인이라는 말은 정신분석가들의 단골 메뉴이다. 이 말은 심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심리적인 기능이 거의 작동을 하지 않아서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을 의미한다. 인간의 심리적인 상처가 얼마나 끔찍한가? 를 표현하는 말로써 우리 조상들이 자주 사용하는 산 송장(살아 있는 시체)이라는 말로 통한다. 정신분석은 마음의 상처를 연구하고 치료 하는 학문이 아닌가? 인격살인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Soul Murder라는 말로써 네이버 파파고(컴퓨터 자동 번역)에 입력을 해 보면 영혼의 살인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진다. soul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영혼, 마음이라는 뜻으로 글자 그대로 영혼의 살인으로 번역되어진다(주㈜: 치료자(필자)2년 전에 블로그에 영혼의 살인이라는 글을 두 차례 올린 적이 있다. 첫 번째 글(2017, 9, 15) 73명 그리고 두 번째 글(9, 21) 174 )으로 반응이 별로였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 나라로 가는데(종교인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또 죽을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최근에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한 여성이 그녀의 현재의 심리적인 기능이 거의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을 치료자가 영혼의 살인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것이 인격살인에 해당된다고 설명을 했을 때 그녀가 영혼의 살해 보다는 인격 살인이 한층 더 호감이 간다고 해서 영혼의 살인이라는 말을 인격살인으로 바꾸기로 했다.

분석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한 이야기가 정신분석의 전문 용어로 채택된 경우는 허다하다. 신경과 의사였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창조하고 심리학자로 변신한 사건이 바로 안나 오(Anna O)양이 아닌가? 그녀가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면서 프로이트에게 이러한 치료는 약물이 아닌 대화로써 치료를 하는 대화 치료(talking cure)가 아닙니까? 라는 말이 정신분석을 대표하는 대화 치료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과 그녀가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과거의 상처들을 끄집어 내서 이렇게 치유를 해 나가는 치료는 바로 굴뚝 청소와 비슷하네요 라고 말을 한 것이 정신분석의 전문 용어인 마음의 정화(abreaction)라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Greenson, 1968, 1978: 주㈜: 참고).

인격이라는 말은 영어로 character라는 말로써 인격, 성격 등으로 번역되어진다. 인격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정신분석가는 프로이트의 제자로써 23세에 비엔나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 외래 진료소를 개설한 윌헬름 레이크(Wilhelm Reich)이다. 그는 비엔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내과 의사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매료 되어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었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는 혁신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정신의학의 과격한 개척자로 불린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신경증 환자의 치료에 국한 시켜야 한다고 못을 박았을 때 그는 정신분석을 인격장애 즉 성격장애의 치료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한 최초의 분석가이다, 그가 1933년에 인격분석(Character Analysis)이라는 저서와 1936년에 섹스 혁명이라는 저서를 출판을 했다. 이후에 그는 나치의 박해를 예견하고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정신분석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접목시킨 사람으로 공산주의자의 숙청에 몰려서 감옥에서 사망한 사람이다(2019, 4, 27, 위키피아 참고). 이후에 인격 분석이라는 용어는 많은 분석가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왔다. 뉴욕의 맨하탄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사피로(Shapiro, 1999: 주㈜: 참고)는 인격의 역동학, 신경증 인격장애의 심리치료 등의 저서가 있다. 인격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정신분석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은 성격(personality)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배우가 무대에서 사용하는 가면이라는 말의 페르소나(persona)(방탄 소년의 최신 곡)에서 유래한 말이다. 성격 장애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는 분석가로는 하버드 의과 대학의 건드선(Gunderson, 1984.1987. 2001: 주㈜: 참고)과 코넬 의과 대학의 컨버그(Kernberg, 1975, 1976, 1984, 1989: 주㈜: 참고)가 있다. 또 다른 분석가들은 자아(self)라는 말로써 많이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들로써 에릭슨(Erikson, 주㈜: 참고), 코호트(Kohut)(Wolf 1988: 주㈜: 참고)가 있다. 코호트는 정신분석의 한 갈래로 자아 심리학을 창설한 분석가이다.

건드슨은 1980년의 DSM-Ⅲ에 처음으로 등장한 10개의 성격장애를 분류한 사람으로 성격장애는 우울증, 불안증, 조울증, 조현병(정신분열증) 등으로 분류되어 사용되어지지 않고 주로 자아분열 성격장애, 나르시즘 성격장애, 보드라인 성격장애가 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컨버그는 신경증 그룹, 보드라인 그룹, 정신증 그룹으로 3가지로 분류해서 보드라인 장애 안에 자아분열, 나르시즘, 보드라인 등을 모두 포함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 등을 종합해서 컨드슨은 21세기는 성격장애로 분류하는 것 보다 자아 장애로 분류되어질 것이라고 예견을 했다.

다시 그리스어의 소울(soul) 즉 마음, 영혼의 사용으로 되돌아가 보자.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마음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 심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심리과학이 탄생한 1879(독일의 라이프찌그 대학 실험실에서 분트(Wundt)에 의해서 실험을 통한 심리학의 등장)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과학이 아닌 마음, 영혼에 대한 관심은 이미 인간의 태생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꿈을 꾸면 꿈 속에서 우리의 영혼, 마음이 몸 밖으로 빠져 나와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다가 다시 깨어날 때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고로 심리학은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프로이트가 그의 대표작으로써 1900년에 발표한 꿈 해석은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없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꿈을 정신분석이라는 현미경을 통해서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해서 치료에 응용한 공로로써 하루 아침에 프로이트가 세계의 명사가 된 저서가 바로 꿈 해석이 아닌가? 고로 꿈은 옛날부터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고 호기심의 대상에서 출발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꿈의 이러한 현상들을 묘사를 해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의 소울은 자유로운 영혼의 뜻으로 이 용어가 나비(butterfly)에서 유래한 것으로 뉴욕 의과대학의 센골드(Shengold. 1989, 1995, 1999: 주㈜: 참고)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나비가 영혼이고 영혼이 나비라고 불렀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되돌아가고 영혼은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간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나비가 꼬치(번데기)에서 빠져 나와서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영혼인 마음도 역시 꿈 속에서 매일 같이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는 것으로 유추를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이 병든 것은 무엇으로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를 했다. 그리스인들은 똑 같은 나비지만 병든 영혼을 나방(moth)으로 비유를 했다. 나비와 나방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르다. 나비는 낮 동물로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용수철 모양의 더듬이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나방은 밤 동물로써 어두침침한 색깔과 용수철과 같은 더듬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고로 고대인들은 나비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죄가 없음으로 나방은 병든 영혼으로 상상을 했다고 센골드는 학술적인 문헌들을 인용해서 노트하고 있다.

동양에서도 나비를 영혼에 비유한 일화들은 많다. 예를 들어서 중국의 도가의 대표자인 장자(莊子)의 나비 꿈이다(내가 나비 인지 나비가 나 인지), 더 붙여서 미완의 책사 사마의의 중국 드라마(2017, 6, 22-7 14)에서 조조의 넷째 아들인 조직의 책사인 양수(약덕조)가 너무 똑똑해서 결국은 34 살 때 조조의 시기심 때문에 계륵(鷄肋)이라는 암호를 발설했다는 죄를 뒤 짚어 쓰고 속죄양으로 처형을 당할 때 그 순간에 노랑 나비가 자유롭게 훨훨 날라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일본의 게이샤(기생)와 미국의 해군 중위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나비부인은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 묘사되어져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5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 즉 시각(보는 것), 청각(듣는 것), 미각(맛보는 것), 촉각(신체 접촉을 하는 것), 후각(냄새를 맡는 것)이다. 그런데 예민한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5감각 이외에도 특이한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는 비유로 우리는 육감(6번째 감각)을 이야기한다. 예술가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감각하고 느낀 것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6감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즉 인간의 특이한 심리적인 면들을 그들의 예민한 촉()으로 느끼고 기술하는 것은 주로 예술가들이다, 그런데 이것을 심리과학으로 기술하고 설명을 하는 심리학자들이 바로 분석가들이 아닌가?

센골드는 나방을 주제로 작품을 쓴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내면 심리를 분석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영국의 천재 시인으로 나방과 벌, 나방과 죽음을 쓴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결국은 스스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여류 작가이다. 그녀는 20세기의 최고의 모드니스트(modernist) 작가로써 존경을 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암 제임즈가 주장한 의식의 흐름의 기법과 대화 기법을 소개한 개척자적인 작가로써 그리고 여성해방 운동의 개척자로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심한 정신적인 장애들로 붕괴되어 여러 번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이었다. 조울증과 다른 정신장애들 때문에 2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고 결국은 그녀 자신의 옷 속에 돌멩이들을 채워 넣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투쟁하는 연약한 생물인 나방을 취약한 정신적인 피해자로 묘사를 했다고 노트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미국의 여류 작가인 엘리자벳 비숍(Elizabeth Bishop)으로 그녀는 출생 5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5세 때까지 그녀의 엄마는 정신병원에 드나들었다. 그녀의 대표작품인 마을”(village)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신의 특징을 묘사한 자서전으로 알려져 있다. 센골드는 비숍에 대한 정신장애의 묘사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친 엄마는 정신병원에 드나들었고 자녀들은 외조부와 아주머니에게 맡겨져 키워졌다. 비명과 메아리는 노바스코티나의 마을에 걸려 이었다.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이 걸려 있었다. 비명은 기억에도 걸리지 않고 언제나 과거에 걸려 있었다. 비숍은 마을 이라는 소설의 작품 속에서 미친 취약한 엄마와 나방에 비유를 하여 옷을 입는 방법으로 묘사를 했다.

5살 난 소녀는 애도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비명을 가지고 검은 곳을 입고 있었다 로 표현하고 있다. 여러 명의 친구들이 비숍이 어른이 되어 옷에 대한 취미를 기술하면서 옷에 대한 감각이 기능공들 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그녀는 검은 색을 싫어했다. 자신의 출판 책에 검은 색의 표지로 덮이는 것을 싫어했다. 엄마의 옷들은 슬픈 갈색 옷이었다고 쓰고 있다. 검은색, 갈색, 흰색 등은 나방의 색깔이라고 적고 있다. 어린이와 병든 엄마는 재난을 가져다 주는 화재(火災)의 설명서로 시에 묘사되어져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집을 삼켜 불태워버리는 화마(火魔)로 묘사되어져 있다.

비숍은 어린 시절부터 만성 기관지 천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엄마에 대한 울음으로 상징하고 있다. 비숍은 알코올 중독과 심한 기관지 천식을 가지고 있었다. 비숍의 엄마는 그녀가 20세 때 사망을 했다. 이 때 비숍이 어린 시절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에서 소녀는 정신이상인 엄마와 하나가 되어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렸다고 표현을 했다. 비숍은 자아 주체성과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 부인(denial), 우울, 알코올 중독, 기관지 천식과 마스키즘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적대감정을 극복하려고 평생 동안 투쟁을 했다. 그 투쟁의 결실은 작품 속에서 녹여져서 후세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고 센골드가 노트를 하고 있다.

다시 그리스 시대의 마음으로 되돌아 가보자. 그리스인들은 마음을 영혼으로 soul로써 표현을 했다. 그러나 또 한가지는 그리스인들이 마음을 바람(psych)으로 사용했다고 시카고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바스크(Basch, 1980: 주㈜: 참고)가 그의 저서인 심리치료의 실제에서 밝히고 있다. 바람은 그리스어로 psych로써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은 존재하는 실체로써 표현을 했다. 마음 역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뜻으로 psych는 그리스어의 바람의 글자인 사이(Ψ)로써 여기에 학문(logy)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용어가 되고 심리학의 상징인 Ψ로써 표시되고 있다. 우리는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않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마음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과 방향을 가진 실체로써 인지를 했다.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그러나 바람은 유치원 어린이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바람에 의해서 집이 날아가고 자동차가 뒤집혀지는 태풍(동남아지역), 허리케인(북아메리카), 토르네이도(회오리바람), 사이클론(인도양) 등은 바람의 힘을 보여주는 용어들이 아닌가? 일찍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그의 시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라는 시에서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아무도 바람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네, 바람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나무 잎이 살랑거릴 때 바람이 지나감을 안다 라고 노래를 했다.

물리학이 등장하면서 제임즈 왓트(James Watt)의 증기 기차는 주전자의 물이 끓은 것을 착안해서 증기 기관차를 만들었다고 배웠다. 이 증기라는 수증기가 바로 열역학(thermodynamics)으로 물리학에서 전문용어로 등장하게 된다. 열 에너지의 힘과 방향이 물리학에서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열역학이라는 열(Thermo)이라는 낱말 대신에 그리스어의 바람, 심리라는 말을 대입시키면 psychodynamics 이라는 심리역동학이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가들이 정신분석학을 확대 시켜서 일명 심리역동학으로 마음의 존재를 힘과 방향으로 연구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심리적인 상처가 어떻게 진화되어져서 인격살인이라는 용어로 등장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정신병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인간이 심리적인 상처를 받으면 정신병이 되고 이것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그는 마음이 병든 정신병을 히스테리아(hysteria)라고 이름을 붙이고 치료를 했다. 히스테리아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자궁(hyster)이라는 낱말에 병(i)(illness)이라는 낱말의 조합어로 자궁이 몸 속으로 돌아다니면서 일으킨다는 정신병으로 등장한 낱말이다. 지금은 자궁이 몸 안에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말이 안되지만) 이 용어가 암시하는 것은 이 병이 여성들의 병이고 섹스와 관계되어져 있다는 말의 깊은 뜻이 있다.

역사가들은 기원전(B.C.) 500(그리스시대)과 기원후(A.D.) 500(로마시대) 1천 년을 고대시대라고 부르고 500년부터 1500년까지를 중세시대라고 부르고 1500년 이후를 현대시대(근대와 현대와 후기 현대로 나누기도 한다)라고 부른다. 역사가들은 중세의 특징을 암흑시대(dark age)라고 부른다. 중세는 기독교 시대로 섹스의 억압(신부와 수녀는 섹스 금지), 금욕, 절제의 미덕을 찬양하고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의 강요와 무지, 미신이 유행을 했던 시대로써 붙여진 이름이다(Ellenberger, 1970: 주㈜: 참고). 기독교에서는 영혼이라 낱말을 soul 대신에 Spiritual이라는 말을 사용을 한다. 뉴욕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센골드는 성서의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을 당할 때 뱀의 유혹 때문에 신이 금지 시켰던 선악과 열매를 따 먹고 낙원에서 추방을 당한 것을 기술하면서 성서에는 악마, 귀신의 문헌적 기록이 없는데 유일하게 구약에서 유태어로 적(adversary)라는 낱말이 뱀의 나쁜 행동을 암시하는 용어로 묘사되어져 있다는 것을 노트하면서 적-그리스도라는 낱말이 등장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시인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의 서사시인 실락원(Paradise Lost)에서 처음으로 사탄(Satan)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성한 영혼의 뜻으로 Holy Spiritual이라는 말이 바로 성령, 신령으로 그리고 반대로 나쁜 영혼으로 사탄이라는 말이 해코지를 하는 나쁜 영혼이라는 말에서 악마, 악령, 악귀, 마귀, 마녀, 귀신 등으로 변질되어 등장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굿으로 엑소시즘(exorcism)인 퇴마의식이 있었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병들게 된 것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기술을 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학적으로 보면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목소리가 달라지고 행동이 이상해지는 현상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 혹은 귀신들이 침입을 해서 인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의 연구들에 의하면 그리스를 제외한 지구 상의 모든 다른 지역에서는 나쁜 영혼으로 귀신, 악마 등의 침범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전통으로 기록되어져 있었다. 이 빙의(憑依: 영혼이 옮겨 붙음: 다음백과사전) 현상을 치료를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샤만(shaman)으로 무당들이 아닌가?

빙의 현상의 폐단들이 드디어 등장하게 된다. 그 시쯤에서(15세기-18세기) 유럽에서는 인간을 해코지를 하는 마녀를 붙잡아서 처형을 하는 화형식이 유행을 하게 되었다. 마녀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귀신을 퍼뜨린다는 이유를 붙여서 불태워 처형을 했다. 이것을 마녀 사냥(witch hunting, witchcraft)라고 부른다. 마녀로 낙인이 찍혀서 그들을 불태워 죽이는 마녀 사냥이 유행해서 유럽에만 약 10만 명의 여성들이(정신병을 앓고 있던) 마녀로 낙인이 찍혀서 화형식(불태워)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프랑스의 구국의 여성으로 영국과 100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의 군대를 백마를 타고 선두에 서서 영국을 대패시킨 19세의 소녀인 잔다르크는 포로로 붙잡혀 화형식(1431, 5, 30에 처형)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이후에 프랑스에서 성녀로 추앙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영화(1999년 개봉 상영)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마녀로 붙잡혀 처형을 당한 이들이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는 이유는 아래에서 소상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14세기-17세기에 르레상스(Renaissance), 문예 부흥이 이태리를 중심으로 그리스, 로마의 시대의 복원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예술과 문화의 재건을 외치면서 인간의 정신을 바로 세우자는 문화 예술의 운동인 인간성 회복 운동은 이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로 전 유럽으로 연결이 된다. 과학이 등장하고 학교가 세워지고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깨달음이 증가하면서 빙의 현상이 귀신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18세기 말인 1774년에 역동적 정신 의학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신부인 가스너가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한다면서 오스트리아의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료를 하는 퇴마의식을 하게 되면서 케토릭 교구에서 수사 위원회가 소집이 된 것이다. 신부가 자신의 직책을 외면하고 귀신 쫓는 굿(exorcism)을 하고 다닌다는 것에 항의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수사 위원의 한 사람으로써 의사인 메즈머(Mesmer)가 가스너의 퇴마의식을 관찰하고 나서 그가 신부복, 성경책, 십자가가 없이도 자신의 손가락 하나로 가스너가 하는 퇴마의식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메즈머는 빙의 현상은 귀신이 씌인 것이 아니고 정신이 병든 것이고 치료 기법으로써 자석 치료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가스너와 메즈머의 더욱 더 상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라).

메즈머는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마침내 의학을 공부해서 늦깎이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의 의사가 자석으로 치료를 한다는 아이디어에 착안을 해서 자석 치료를 고안하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에 뉴톤의 물리학이 그리고 전기, 자석, 자장 이론들이 등장하면서 과학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메즈머는 그리스 시대에 등장을 했던 정신병인 히스테리아라는 이름을 복원시켰다. 정신병을 히스테리아로 그리고 자신의 치료 이론을 책으로 그리고 유체이론 논문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것을 역동적 정신의학의 역사가들은 중세의 맹목적인 종교적인 믿음에 대한 거부로 그리고 무지, 미신에 대한 싸움에서 이성과 과학의 승리로 보고 있다(Ellenberger, 1970).

50년 후에 메즈먼의 자석 치료는 영국이 외과 의사인 브레이트(Breid)에 의해서 1843년에 자석의 힘에 의한 효과가 아니고 잠을 자는 것과 유사하지만 잠이 아닌 것으로 최면의 효과임을 밝혀내고 최면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최면학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프랑스에서 의과 대학 내과 교수였던 신경학자인 가르코트(Charcot)와 베른헤임(Bernheim)에 의해서 파리가 세계적인 히스테리아의 치료의 메카가 된다(프랑스의 최면 학교인 낸시 학교와 가르코트 학교에 대해서 더욱 더 상세하고 알고 있는 사람은 다음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라). 여기에서 드디어 프로이트가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비엔나 의과대학 레지던트 4년차 때 의과대학에서 우수한 레지던트 3명을 선발해서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게 되어 프로이트가 3명중에 한 사람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파리에 가르코트의 최면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1885, 10월에 카르코트의 살페트리에 최면 학교에서 6개월 동안 최면학을 공부하게 된다(Ernest Jones, 1953, 1955 1958: 주㈜: 참고).

가르코트는 화요일에는 히스테리아와 최면에 관심을 가진 전 세계의 명사들 앞에서 제자들에 의해서 부축이 되어 치료실 안에 데리고 온 환자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치료를 하는 모습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었다(사례 삽화 그림 참고). 금요일에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모임 앞에서 강연을 했다. 여기에서 가르코트의 살페트리에 병원을 방문한 세계적인 역동적 정신의학의 3명의 대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첫 번째가 6개월 유학을 갔던 정신분석학의 창설자인 프로이트이고 두 번째는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로써 살페트리에 병원의 실험실에서 9년 동안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하면서 심리적인 상처인 해리장애를 규명한 피에르 장(Pierre Janet) 그리고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암 제임즈(William James)이다. 가르코트는 최면을 걸어서 히스테리아 환자들의 핵심 문제는 근친상간, 강간, 신체적 폭력, 학대가 핵심이고 이러한 것들은 어린 시절에 심리적인 상처 때문에 정신병인 히스테리아가 발발한 것이라고 밝혀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섹스심리학의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 환자가 최면에 걸렸을 때 잊어버린 과거의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코트의 최면 실험을 통해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는 최면 동안에 최면사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본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전유물인 무의식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물론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하루 아침에 프로이트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896(8,4 - 8.7)에 문헨에서 열린 제 3 차 국제 심리학 총회에서 전 세계에서 500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인 가운데 독일 문헨대학의 철학 교수였던 데오도어 립스(Theodor Lipps)는 무의식의 개념에 한 개의 인상적인 논문을 읽었다. 그는 무의식 이론과 공감이론으로 철학과 심리학에 공헌한 사람이다. 그는 무의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무의식적인 생활의 일반적인 근거는 바다 밑의 산맥들의 연결 구조와 같다. 그 안에서 꼭대기가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생활은 무의식적인 이미지상 들에 의해서 좌우되어진다. 고로 과거의 이미지상 들은 지금 나안에서 활동을 한다. 그러므로 나도 모르게 그들이 활동을 현재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의식은 완전히 생리학적인 관점에서 설명이 되어질 수가 없다는 그 자체가 심리적인 현실이다 라는 유명한 발표를 했고 프로이트가 그의 논문에 밑줄을 치고 즐겨 인용을 했고 그것을 수용하고 그를 존경했다. 프로이트 무의식의 빙산의 이론(빙산의 물위의 부분은 의식이고 물밑에 가라앉은 부분은 무의식)은 립스의 바다 밑의 산맥에서 따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섹스 이론은 영국의 의사로써 세계적인 섹스학의 대가인 하베록 엘리스(Havelock Ellis)의 동성애(1897) 저서와 그의 오토에로틱(autoerotic) 이론은 이후에 프로이트에 의해서 수용되어 더욱 더 깊은 연구에 길을 열어주게 된다, 여기에다 비엔나 의과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크랍트 어빙(Kraff-Ebing)1886년의 저서인 섹스의 정신병리학에서 11개의 변태성욕의 원인과 그의 정신의학적인 연구에서 프로이트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노트하고 있다(Ellenberger, 1970).

프로이트는 1900년에 꿈 해석, 1905년에 섹스에 대한 3개의 논문(유아 성욕론), 그리고 1913년에 토템과 터부를 자신의 3대 걸작품으로 보고 있다. 꿈 분석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야기는 이미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유아 성욕이론인 리비도 이론과 토템과 터부를 통해서 근친상간의 금기의 역사적인 진화를 살펴 보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진화론에 대한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생물체의 진화 과정에 대한 그의 확신은 초반기 그의 연구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의과대학 4학년 때 크라우스(Claus)교수의 현미경 실험실에서 연구 조교로써 시작을 했다. 그의 첫 연구 논제는 칠성장어의 성기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선임 연구자가 2년 전에 발견한 장어의 볼록한 기관을 사라진 고환으로 기술한 것을 눈으로 확인을 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장어의 고환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그 실험은 끝이 났다. 그가 4개월에 걸쳐서 400마리의 뱀장어의 성기구조를 현미경을 통해서 연구를 했으나 결국은 찾아내지 못한 것을 실험의 실패로써 안타까워했다. 결론에서 그는 이전의 연구자인 시르스키(Syrski)의 결론을 인용하면서 논문을 끝냈다. 그러나 지도 교수인 크라우스는 과학자의 자세로써 그의 철저한 현미경 실험의 빈틈없는 과정을 격찬해서 연구 논문집에 실어주었고 프로이트의 첫 번째 연구 논문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어서 그는 계속해서 가재, 왕새우 등의 척추의 연구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에 부케(Brucke) 생리학 연구소로 이동을 해서 계속해서 척추 동물의 연골, 숨골의 수질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고양이, 강아지 새끼들의 뇌의 연골, 수질을 그리고 이후에 고등동물로 이어지면서 세포의 기본 단위는 변함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가 간발의 차이로 세포의 기본 단위인 신경세포(neuron)이라는 신조어의 발견을 놓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 연구 과정에서 그는 생물체가 진화로 이어져왔다는 것에 확신을 하게 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가 되었다(Ernest Jones, 1953).

다시 그의 토템과 터부(1913)에서 인간 사회의 근친상간의 금기의 진화의 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인간의 새벽에 최초의 원시 인간들은 가족 단위로 모여 공동체를 구성해서 살았다. 그 공동체의 리더는 그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힘이 센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 가족의 구성원들을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보호해주는 동시에 가족구성원들의 섹스를 독점을 했다(동물들의 집단 생활에서 가장 힘이 센 수놈을 보라). 아버지의 섹스 독점을 넘보거나 침해하는 아들들은 폐각추방 하거나 거세로서 처벌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아버지는 노쇠해지고 아들은 성장을 하면서 점점 강해지게 된다. 아들은 청년이 되면서 아버지의 힘이 약해진 것을 알고 동생들과 합류를 해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시신을 먹었다. 아버지처럼 힘이 센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를 동일시(identification)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리더는 똑 같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점점 나이가 먹어가면서 아버지가 된 아들은 성장을 하면서 성숙해지는 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문화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인용을 하면서 각 부족들은 제 각각 그들의 고유의 토템(동물숭배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을 했다. 우리나라의 토템은 곰이 아닌가?  동물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로써 단군 신화는 곰을 우리 민족의 토탬으로 삼았다. 그 토탬들은 존경을 받으면서 잡아 먹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가장 힘센 동물인 곰을 잡아먹었다. 그것은 곰처럼 힘이 센 강자가 된다는 동일시로써 그 곰은 바로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들이 성장을 해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시신을 먹었다는 토템의 인류학적인 신화는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정신분석 학자들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어린 시절인 0-1세 때는 엄마의 품에서 자란다. 엄마의 등에서 품에서 엄마의 보호 속에서 자란다. 1-3세 때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된다(모든 것은 부모님이 다 대신해 주게 된다 고로 나르시즘의 피크). 걸어 다니면서 환경의 탐색가가 된 아들은 스스로 환경의 탐색을 하게 되면서 혼자의 힘으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시점인 3-5세 때 지금까지 가장 가까웠던 엄마와 아들 사이에 아버지가 끼어들게 되면서 어린이의 눈에는 아버지가 거인으로 보이게 된다. 이어서 동생이 태어나면서 어린이는 자신의 방으로 쫓겨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방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엄마와 가까운 사람이 자신이 아니고 아버지 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어린이의 나르시즘은 최소화 되고 이것이 자아의 핵심으로 자신감으로 자리잡게 된다(코호트의 나르시즘 이론을 보라).

아들은 이 시점에서 아버지는 전지전능하고 거인처럼 보이고 자신은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연약한 어린이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처럼 강자가 되겠다고 아버지를 동일시하게 된다(오디프스 컴플레스의 해결). 이후에 아들이 점점 청년으로 성장해 가면서 힘이 강해지게 되면 노년이 된 아버지는 아들의 힘과 위협을 두려워하게 된다. 언제 아들이 아버지의 힘을 넘보고 아버지를 대신하게 될지를 두려워하지 된다. 이것이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심리적인 힘 겨루기로 프로이트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인간의 새벽으로 되돌아가 보자. 아버지가 노년이 되면서 아버지는 강자가 된 아들에 의해서 생사가 좌우됨을 불안하게 느끼게 된다. 노년이 된 아버지는 아들이 건장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는 점점 불안하게 되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사회적 계약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거쎄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들의 여성들을 섹스적으로 넘보지 말 것을 약속 받으면서 대신에 성년이 된 아들은 자신의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들의 파트너와 결혼으로 출가를 하면서 섹스의 해결을 약속 받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근친상간 진화의 첫 시작으로 사회적 계약이 설립되어지게 된 것을 진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진화를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야생의 동물들의 진화에서 그 증거를 찾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하늘의 신 우라누스(Uranus)와 지구의 신 가이아(Gaia)가 결혼을 해서 낳는 아들들을 우라누스가 모두 지하의 세계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가이아는 막내 아들인 크로노스(Cronus)를 보호해서 아들을 살려냈고 그가 청년이 되면서 아버지인 우라누스가 어머니 가이아를 위협할 때 아버지를 살해를 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서 그가 농업의 신이 되었다. 크로노스는 결혼을 해서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리아(Rhea)가 낳은 아들을 모조리 잡아 먹었다. 여기에 분노한 라이아가 막내 아들인 제우스(Zeus)를 보호해서 숨겨 주었고 제우스가 청년이 되어 마침내 아버지를 거세시키고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신화들을 인용하면서 프로이트는 종종 때로는 신화가 과학만큼 유용할 때가 있다고 노트를 했다.

또 한가지는 야생의 동물들 중에서 사자 가족의 예를 들어 보자. 동물 심리학자들이 비디오와 TV 카메라로 24시간 몇 년 동안 야생의 동물들의 행동과 가족 생활을 연구한 보고서들은 프로이트의 이러한 이론을 지지해준다. 사자의 가족은 모계사회이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암놈들이 사냥을 하고 양육을 분담을 한다. 그런데 사자의 가족들은 암놈은 성장을 해서 같이 살지만 수놈은 3살이 되면 야생으로 쫓아내버린다. 야생에서 혼사서 강자가 되거나 살아남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된다. 사자의 엄마는 암 사자들을 데리고 작전을 해서 사냥을 한다. 먹이를 사냥을 하면 제일 먼저 아버지 사자 즉 수놈이 와서 먹이를 먹고 나서 다른 사자구성원들이 먹이를 먹게 되는 위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아버지 수놈 사자는 양육도 하지 않고 그리고 사냥도 하지 않으면서 먹는 것은 제일 먼저 먹는가? 하는 의문은 곧 풀렸다. 외부의 적이나 위협에서 수놈인 아버지 사자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가족 구성원들을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사자 역시 노쇠해서 늙어서 힘이 없어지면(사자의 전성기는 2년으로 본다), 외부의 다른 강한 수놈의 사자가 침입해올 때 방어를 해서 쫓아내지 못하면 아버지 사자는 쫓겨나게 되고 새로 주인으로 자리를 차지한 수놈 사자는 암놈 사자가 낳은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 죽여버리는 것이다. 고로 새끼 사자의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아버지 사자라는 점이다. 새로 강자가 된 수놈 사자는 자신의 핏줄이 아닌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아무니 발버둥쳐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암 사자는 새끼들이 죽고 나면 3 -4일 안에 발정으로 수놈 사자와 섹스를 가지고 새끼를 낳게 된다는 것이 야생의 사자 가족의 자연의 법칙이다 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암놈 사자는 강한 수놈 사자를 만나지 못하면 새끼를 낳아서 안전하게 양육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3살 때 야생으로 쫓겨나게 된 수놈 사자들은 야생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강자가 되어야 가족을 일룰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와 유사하다.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호머의 서사시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영웅 오디세이(로마의 율리시즈)가 세계를 여행하면서 각종 모험으로 살아 남아서 위험 속에서 살아남은 경험의 지혜들로써 그리스를 통치하는 현명한 왕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사춘기를 거치면서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익히고 통합을 해서 성숙한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어 왔던 우리의 역사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이러한 인간 사회의 진화는 문화 인류학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시카고 대학의 문화 인류학자인 헤르데트(Herdt)는 그가 파푸아 뉴기니아의 외딴 섬, 삼비아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5년간 생활을 하면서 UCLA의 정신분석학자로 세계적인 섹스학과 변태성욕의 대가인 스톨러(Stoller)를 초대해서 삼비아 족의 동성애 연구와 사먄(Shaman, 무당)의 연구를 하면서 삼비아 족의 삶에서 원시시대의 인간의 모습의 원형을 발견한 것을 기술하고 있다(Herdt & Stoller, 1990: 주㈜: 참고)(상세한 것은 삼비아 족의 삶을 소개한 블로그에 들어가 보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들은 바로 먼 곳이 아니고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힘겨루기는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의 관계가 바로 그러한 관계이다. 이성계가 힘이 강할 때는 이방원은 위협을 받아서 꼼짝하지 못했다. 이방원은 조선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왕위 계승을 약속 받았지만 아버지가 둘째 부인 강씨의 소생으로 방석과 방번의 형제를 세자와 왕자로 책봉을 했을 때 꼼짝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방석과 방과 형제를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하고 아버지의 힘을 거세시켰다(무인정사, 1 차 왕자의 난). 유사한 사건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결국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된 것도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섹스 관계가 허용된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이집트시대 혹은 신라시대 성골과 진골 사이에 결혼은 순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섹스는 아니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인 상처 가운데서 가장 큰 상처가 바로 근친상간의 상처라는 것은 가르코트가 발견을 했다. 동시에 우리가 성장을 하면서 근친상간의 위험을 항상 무의식적으로 경고를 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욕설들은 대부분이 근친상간 섹스와 성기에 관계된 욕설들이 아닌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욕설이 개새끼 이다 서양의 욕설로 개새끼는 son of bitch 로 매춘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동서양의 공통적인 욕설인 개의 새끼는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비 없는 후레자식으로 과거 우리 부모들이 사용하는 욕설들이 모두가 근친상간을 경고 하는 욕설들로 우리가 머리 속에 각인 되어져 있기 때문에 금기의 위배는 심리적인 상처로써 가장 치명적이 된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오디프스의 이야기는 바로 근친상간의 금기를 위반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를이야기하고 있다. 오디프스는 태어나자 말자 예언자에 의해서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엄마가 아들을 죽이라고 하인에게 명령을 함으로써 시작된다. 하인이 차마 죽일 수가 없어 칼로 발을 찔러서 산에 버렸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행인이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인근의 토호(지방 부호)의 집 문 앞에 놓아두었고 이것을 발견한 하인이 주인에게 아기를 데리고 나서 오디프스(그리스어로 발이 퉁퉁 부은 사람이라는 뜻)는 그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게 된다.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테베의 왕이 사망으로 공석인 왕의 자리를 스핑크스의 수수깨끼를 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을 왕으로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스핑크스의 수수깨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되어 왕비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7년 후에 흉년이 들어서 예언자에게 원인을 물어 보았을 때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 통치를 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시비 끝에 죽인 노인이 바로 아버지이고 결혼한 왕비가 어머니인 것을 알고 스스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고 황야에서 방황하면서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오디프스는 그리스의 4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이다. 그리스 인들은 이 작품을 연극으로, 공연으로 보면서 인간의 근친강간의 비극들을 경고하고 각인 시켜주었다.

다시 프로이트의 섹스에 대한 3개의 논문에서 리비도 이론으로 들어가보자.

프로이트는 3-5세의 기간에 인간의 본능인 섹스 욕구가 표면화 되는 기간으로 기술을 했다. 어린이들은 부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관계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성관계를 한다는 것을 안다, 성기를 만지면 즐겁다는 것, 남자와 여자가 성기가 다르다는 것, 남자는 페니스를 가지고 있지만 여자를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섹스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배꼽놀이, 의사놀이 등을 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부모의 섹스 관계의 노출이 과도하게 섹스 욕구를 자극(과대자극)하거나 부부 관계의 단절로 부모가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 않거나 부부 사이에 비난과 비판 등은 이 기간에 섹스 욕구에 과소자극이 어린이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 바로 리비도 이론이다. 오디팔 기간 동안에 아들은 엄마를 통해서 섹스 욕구를 개발하고 딸은 아버지를 통해서 섹스 욕구를 개발하면서 사춘기에 진입하게 되면 아들은 아버지의 거세 위협과 처벌 때문에 엄마를 포기하고 엄마를 닮은 여성으로 그리고 딸은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닮은 남성으로 향하게 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 생활로 진출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이성과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독립된 생화를 해 나가는 인간의 발달 단계를 프로이트는 구순기, 항문기, 오디팔기, 잠재기, 성기기(사춘기)5 단계들을 섹스 욕구의 발달과 성격형성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유아 성욕이론을 발표하면서 3-5세의 어린이들이 섹스 욕구를 가지고 있고 성기를 만지면 즐겁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른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고 경고를 했다. 즉 히스테리아의 핵심 원인인 근친상간, 강간의 상처들은 성인들이 섹스 욕구를 가진 어린이들을 유혹해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유혹 이론이다. 그는 1896, 4, 21에 비엔나 신경정신과에서 유혹 이론을 발표를 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897, 9, 21에 유혹이론을 포기를 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유혹 이론이 몰고 오게 될 후유증을 예견한 것이었다(Davies & Frawley, 1994: 주㈜: 참고). 히스테리아 환자들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서 근친상간, 강간의 상처들을 밝혀냈지만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장애물에 부딪치게 된 것이었다. 히스테리아 환자들은 노동자 농민들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귀족과 중, 상류층의 자녀들도 포함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고소 고발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 프로이트는 유혹 이론을 포기하고 상상의 상처 이론인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으로 어린 시절에 부모의 섹스 장면에 노출로써 섹스 욕구가 상처를 받아서 상상적인 상처로 신경증의 발발하게 된다는 이론으로 돌아갔다. 하버드 대학의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허만(Herman, 1997: 주㈜: 참고)은 그녀의 저서인 상처와 회복에서 프로이트가 섹스 이론으로 인한 사회적 물의를 예견하고 그들의 비난과 고소 고발을 의식해서 섹스의 상처라는 판도라의 상자의 문을 닫아버린 것을 지적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예견은 적중을 했다. 정신분석가들이 신경증 환자의 치료를 하면서 곳곳에서 이런 파열음들이 들리게 된다. 1908년에 런던에서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이 환자들에게 섹스에 대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런던 신경학회 회원의 탈퇴가 요구되었다. 또한 논문집에 실린 섹스 논문이 외설로 취급되어 취소되고 새로 발간되는 사건이 발생을 했다. 호주에서는 프라이즈(Frazer)라는 목사가 정신분석에 흥미를 가졌다는 이유로 목사 직책에서 파면 되었다. 같은 해에 베를린에서 정신분석가인 울프(Wulff)가 정신분석에 흥미 때문에 그가 근무하는 기관에서 해고 된 후에 러시아로 가서 활동을 했다. 1910년에 볼티모어의 미국심리학 총회에서 정신분석이 미국의 청교도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더 붙여서 미국 병리심리학(이상 심리학) 논문집에 리비도 이론이 소개 되자 청교도들이 논문 편집인인 모르톤 프린스(Morton Prince)를 경찰에 고소를 한 것이다. 그 사건은 프린스가 잘 아는 경찰서장에 의해서 무마가 되었지만 미국의 병리심리학 논문집에는 그 이후에 더 이상 프로이트의 논문이 실리지 않았다. 같은 해에 함브르그 의학 총회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쓸모 없는 꿈들로 그리고 환자들의 섹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공격을 받았다. 1911년에 그리고 또 한번은 1917년에 쥬리히의 정신분석가인 오스카 피스트(Oska Pfister) 신부가 신부 서품식에서 정신분석가 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두 번이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20년에 런던에서 컨터베리 주교가 위원회를 소집해서 자위행위 윤리연구를 요청했다. 이어서 왕립의학 대학과 왕립 의학학회에서 정신분석의 외설을 수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정신분석에 우호적으로 나타난 것은 다행이었다고 존(Jones)이 노트하고 있다(Ernest, Jones 1955, 주㈜: 참고).

정신분석가들의 심리적 상처 이론의 한 축인 섹스 이론에 대한 투쟁은 1920, 9, 8-12 일까지 네절란드에서 열린 제 6회 국제 정신분석학회의 참가 멤버가 고작 122명 이였다는 보고를 감안하면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들이 20세기 초반에 정신분석의 이론을 세계에 전하는 씨앗이 되었다는 점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고진분투는 이후에 조금씩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심리적인 상처가 결정적으로 인식을 받게 된 것이 바로 1914-1918년까지 4년 동안 계속된 제 1 차 세계 대전이었다. 여기에서 새롭게 군인들의 전쟁 후유증이 등장하게 된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벌벌 떨거나, 불면증으로, 그리고 소화기 장애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설사, 변비, 마비, 무감각 등으로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여기에다 탈영병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포탄 쇼크로 명명이 되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전쟁에서 이러한 군인들이 속출하면서 군대에서는 그들을 전투를 두려워하는 정신이 빠진 비겁한 사람으로 그리고 군기가 빠졌기 때문에 체벌과 처벌로써 다스렸다, 이 시점에서 비엔나 정신의학 학회에서 이들을 치료를 하는 두 가지 방법이 등장하게 된다. 한쪽은 전기 쇼크로써 충격을 가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정신분석의 치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제 1 차 세계 대전에 참가한 오스트리아의 육군 중위 카우드(Kauders)1920년에 전기 쇼크의 학대로 고문으로 당했다고 의회에 호소하게 됨으로써 오스트리아 의회가 청문회를 열게 된 것이었다. 그 사건은 대학교수이자 명망 있는 변호사인 알렉산더 로퍼(Alexander Loffier)가 맡아서 전기 쇼크를 창안한 비엔나 종합 병원의 원장인 정신과 의사인 와그너-쪼레그(Wangner-Jauregg)와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를 초청하게 되였다. 쪼레그는 비엔나 의과 대학의 프로이트의 3년 후배로 말라리아의 예방 접종과 치매의 마비증에 대한 치료의 공로로 1927년에 정신과 의사로써 최초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들 군인들을 꾀병으로 비겁한, 겁쟁이로 몰아붙였다. 대신에 프로이트는 그들이 꾀병 환자가 아니고 신경증 환자로써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환자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양쪽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다. 쪼레그는 이들 군인들 중에서 전쟁 포로로 붙잡힌 군인들 중에서는 포탄 쇼크 군인들이 한 명도 없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군인들은 포탄 쇼크를 호소하는 환자가 없었지만 포탄 쇼크를 호소하는 이들 군인들은 모두가 사지가 멀쩡한 비겁한 사람이고, 용기가 없는 겁쟁이들로 꾀병 환자들이라고 맹공을 했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이들은 전생 신경증 환자이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로써 역할은 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치료해주고 보호해주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의 제자들이 각각 4명씩 자신들의 이론들을 변호하는 방어권이 주었다. 쪼래그 쪽의 정신과 의사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포탄 쇼크 환자들에게 치료 효과가 미미한 반면에 전기 쇼크는 즉석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보고를 했다. 프로이트 쪽의 분석가들은 다국적 군인(폴란드, 체코, 항가리 등의 국가들이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들의 언어 장애 때문에 효과가 적었다는 것을 인정을 했다 동시에 정신분석은 단기 치료가 아니고 장기치료인 점을 강조를 했다. 결과는 서로 의견이 팽팽해서 무혐의로 처리가 되었다(Ellenberger, 1970).

2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하면서 정신분석가들의 전쟁 신경증의 논문들이 발표 되면서 심리적 상처의 이론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미국인 정신과 의사로써 프로이트 밑에서 1년 동안 정신분석을 연구한 아브라함 카디너(Abraham Kardner) 1941년에 전생 신경증 이라는 저서가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주의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군인들의 전쟁 신경증은 히스테리아의 증세들과 유사하다는 것과 그들을 정신분석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을 한 것이었다.

 전쟁의 심리적인 상처들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국민들에게 확대가 된 계기는 미국이 한국의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베트남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용맹한 특수부대 군인들이 장기간 전쟁에 노출되면 심각한 전쟁 후유증으로 전쟁 신경증 환자가 된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확대되어져 갔다(영화 람보를 보라).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 보다 전역 후에 자살 군인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통계 연구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미국 육군성에서는 군에 입대하는 군인들에게 심리검사를 실시하는 것과 군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되었다(Herman, 1997).

그런데 여기에서 결정적인 사회적 운동이 심리적 상처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대중으로 확대를 불러 일으키게 된 사건들이 1970년대부터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후반기에 프로이트가 들고나온 근친상간, 강간과 폭력의 상처 이론은 유혹이론으로 등장했다가 프로이트가 감당하지 못해서 상상 속에서 상처가 된 오디프스 이론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이미 노트가 되었다. 20세기 초반기까지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금기시 된 사회였다. 그런데 1960년데 후반기에 미국의 페미니스트의 대부인 베티 프레디안(Betty Friedan) 여사가 1966년에 쓴 여성의 신비라는 저서가 여성 해방 운동의 불씨가 된 페미니즘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 덮어두고 금시기 된 가족문제의 뚜껑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가족은 프라이버시의 성역으로 접근 금기라는 미명하에서 여성들이 가정 폭력과 근친상간, 강간의 희생자가 된 것임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의 의식 일깨우기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뉴욕에서 근친상간의 폭로 운동으로 연결 되었다(Herman, 1997).

오늘날 미투 운동(Me Too) 2017, 10월에 해시태그 운동(다음 백과: 미투 운동(영어: Me Too movement)미국에서 시작된 성폭행이나 성희롱의 발생되는 것을 청산 하기 위한 해시태그 운동이다. 2017 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다)으로 시작된 것은 이미 47년 전에 시작된 뉴욕의 근친상간, 강간의 폭로 운동이 바로 그들의 전신이었다.

 1970년에 미국 전국 여성 연맹이 강간의 법률을 개정해서 성폭행으로 개정하는 법안이 통과 되면서 이후에 10년 만에 미국의 50개 주를 통과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정신분석가들이 강간의 피해자들을 정신분석으로 치료를 하면서 강간의 후유증으로 순결을 잃었다. 더럽혀 졌다. 더 이상 처녀가 아니다 라는 인식 때문에 치료하기 어려움들이 널이 퍼지게 되면서 강간이라는 말을 성폭행이라는 말로 대체 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72년에 보스톤 시립 병원의 정신과 간호사이자 치료 심리학자인 안 부르게네스(Ann Burgess)와 사회학자인 린다 홀스트롬(Lynda Holstrom)이 공동 연구로써 강간의 심리적인 상처 증후군이 발표 되었다. 여기에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히스테리아 증세들, 전쟁 신경증의 증세들과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휴식이 없다, 과도한 긴장, 쉽게 놀랜다, 짜증, 소리에 예민함, 무감각, 마비, 불면증, 프레시백(상처 장면이 반복해서 재 등장), 입맛 상실, 악몽, 자살 등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1975년에 미국 국립정신건강 연구소 안에서 성폭력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80년에 사회학자인 다이아나 럿셀(Diana Russell)이 미국 전국에 900명의 성인 여성들의 설문통계 조사 연구를 통해서 5명중에 1명이 성폭행, 4명 중에 1명은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발표가 되면서 온 미국 사회가 벌집을 쑤진 결과를 가져왔다. 드디어 이들의 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1980년대부터 심리적 상처 이론과 성폭행 이론이 심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가정 폭력과 성폭행의 연구가 불이 붙기 시작을 했다. 이어서 심리학자 워크(Walker)가 매맞는 여성 증후군, 매맞는 어린이 증후군의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드디어 가정 폭력 이라는 신조어가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가정 폭력의 희생자들인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임시 보호를 위해서 쉼터(Shelter)가 등장하게 되어 미국의 전역에서 2000여 개가 설립이 되었다(Herman, 1997).

 프로이트의 근친상간, 강간의 심리적 상처 이론의 판도라의 상자가 닫힌 지 100년 만에 다시 열리면서 강간의 상처, 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 이론이 드디어 대중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라고 하버대 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허만(Herman, 1997)은 노트를 하고 있다.

 점차적으로 심리적인 상처가 일반 사회인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어져 갔다. 여기에서 히스테리아, 성폭력 증후군, 전쟁 신경증은 그 증세가 유사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게 됨으로써 드디어 1997 DSM--R( 3 DSM 수정본의 개정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이름을 부여 받게 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가정 폭력, 성폭행, 전쟁, 자연재난으로 인한 다양한 심리적인 상처들 예를 들어서,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심리적인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포함되는 장애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5년이 되는 2013, 5월에 개정된 제 5 차 정신장애에 대한 통계와 진단 분류 지침서인 DSM-Ⅴ에서 PTSD는 이전의 불안장애의 소속에서 떨어져 나와서 독립된 분류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로 주의 관심을 돌려 보기로 하자.1970년대에 뉴욕에서 시작된 여성해방 운동의 물결은 1985년에 우리나라에서도 폭발하게 되었다. 구로 공단의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에 대한 인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서울대학 의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에 휴학을 하고 공단의 노동자로 취업한 xx 양이 공단의 파업 운동의 주동자로 xxx 경찰서의 형사에게 성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xx양이 경찰봉으로 성기를 고문당했다는 폭로가 터지면서 여성단체와 인권단체의 투쟁으로 1988년에 담당 형사가 처벌을 받고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xx 경찰서 성고문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섹스와 폭력에 대한 저항의 운동으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기록이 된 사건이다.

 그런데 이어서 다시 성폭력(강간의 사건)의 사건이 연이어 터져 나오게 되었다. 1991, 1월에 xxx 부인이 9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웃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이웃집 아저씨 S(당시 35) 에게 성폭행(강간)을 당했고 그 사건을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혼자서 고민하다 점점 친구관계가 망가지고 외톨이가 되면서 정신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후에 결혼을 했으나 실패하고 30세 때 정신분열증(조현병) 환자가 되었다. 그녀는 삶이 완전히 망가진 것에 분노해서 S씨를 살해했다. 그녀는 살인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되면서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여성 단체들과 인권 단체의 도움으로 1심에서 징역 2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난 사건이다(김종만, 1999,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

 두 번째가 xx양 사건이다. 그녀는 7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으로 언니는 아버지와 함께 xx양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녀는 7살에 어머니의 재혼으로 법원에서 행정 서기로 일하는 양부를 만나게 되었고 9살 때부터 양부에게 성폭행(강간)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녀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8년 동안 계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에 어머니가 이것을 알게 되었지만 방치를 하게 되었다. 계부는 부인인 xx양의 어머니와 xx양과 함께 세 사람이 같이 한 방 안에서 섹스를 한 것으로 수사결과 드러났다. 그녀가 대학생이 되면서 그녀의 남자 친구인 xx 군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았고 두 사람이 공모를 해서 1992, 1, 17일에 계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1심에서 4년 남자 친구는 7년의 선고를 받았으나 22명으로 구성된 인권변호사, 여성단체의 변호로써 2심에서 xx양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건이다(김종만, 1999,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

 여기에서 성폭행의 상처가 살인적 분노를 동반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정신분석가들이 왜성폭행은 인격살인으로 영혼의 살인으로 묘사하고 있는가?를 실제 사례로써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 아닌가? 우리의 주변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모두가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성폭력의 희생자는 인격살인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성폭행의 후유증은 이미 128년 전에 영국의 소설가인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의 작품인 더브빌 가의 테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테스의 이야기는 영화(로만 폴란스키 감독, 1979년 작품), (나스탸샤 킨스키 주연으로 2014, 11, 20 개봉 작품), 드라마(BBC 방송의 시리즈 작, 2008 4부작), 오페라, 뮤지컬 등등으로 수 없이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영국의 고전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닌가?

시골 소녀인 테스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가 명문가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노동일을 거부하면서 가족부양(동생들)을 이유로 더브빌 가문을 팔고 있는 한 부자 집에 양딸로 가게 된다. 말이 양딸이지 가정부의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을 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집 주인의 조카인 난봉꾼 젊은이가 테스를 강간해서 임신으로 쫓게 오게 되고 출산을 하게 되면서 처녀가 아기를 낳게 된 것이었다. 영양 실조로 아기가 사망하고 나서 마을 사람들과 동료들의 멸시 조롱으로 외톨이가 되어 남의 집에 품팔이로 연명하든 중에 그녀의 마을에 목사 지망생으로 부임한 청년 엔젤의 마음에 들게 된 테스는 그녀의 삶이 행운을 가져다 줄 것처럼 희망이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를 숨길 수가 없었다. 양심의 명령으로 테스는 그녀의 과거를 고백한 장문의 편지를 써서 엔젤의 하숙방으로 찾아갔지만 엔젤은 외출을 가고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그 편지를 도어문 밑에 밀어 넣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만약에 엔젤이 그녀를 용서한다면 그와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일이 지나도 엔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테스는 엔젤이 그녀의 과거를 용서한 줄 알고 결혼을 승낙했고 신혼여행을 끝내고 엔젤의 하숙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어문 밑에는 그녀가 밀어 넣었던 그 편지가 양탄자 밑으로 들어가서 엔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 수없이 엔젤에서 그 편지를 보여주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은 엔젤은 안색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면서 처녀가 아닌 테스, 출산을 한 테스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언제가 그가 테스를 용서할 수 있을 때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남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테스는 자포자기로 삶을 포기를 했다.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서 호구지책으로 그 난봉꾼의 첩으로 들어가서 술과 담배와 호화방탕 한 생활에 빠져버렸다(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삶).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을 무렵에 어느 날 엔젤이 찾아와서 그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나 테스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죽은 사람이 되었으니 엔젤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거부를 했다. 엔젤은 할 수 없이 테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저녁에 xx 시에 런던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순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테스는 강간 당해서 그녀의 삶이 완전히 망가진 자신을 발견하고 억압되었던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가해자인 난봉꾼을 칼로 살해를 하고 허둥지둥 엔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정거장으로 달려가서 엔젤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수사관들이 그녀를 체포하러 올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어줄 것을 애원을 했다. 엔젤이 동의를 해서 두 사람은 인근의 산 속으로 도망을 갔다. 산속에 빈 별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 별장에서 첫날 밤을 보낸 두 사람은 아침에 별장지기(돌봄이)가 온 것을 보고 부랴부랴 도망을 갔다. 그 별장지기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수사관들이 테스를 추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엔셀과 테스는 산속에서 하루 밤을 서로 껴안고 체온으로 밤을 세웠다. 그들이 잠을 잔 곳이 바로 영국의 선돌과 고인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옛날의 원시인들의 무덤인 것은 인상적이었다. 아침에 기마경찰에 의해서 체포된 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엔젤에게 남긴 한마디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당신과 함께 보낸 2일 동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여기에서 치료자가 강조를 하고자 하는 것은 128년 전에 쓴 이 작품에서 하디(Hardy)가 원제인 더브빌가의 테스라는 제목 밑에 부제목으로 달았던 순결한 처녀라는 제목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섹스의 이야기의 금기시와 섹스 담론 금기를 건드린 결과로 그 당시 언론과 일반 사람들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된 것이었다. 강간을 당한 처녀, 순결을 잃은 처녀, 임신으로 사생아를 낳은 처녀를 순결하다고 한다면 양가 집의 처녀들이 그것을 보고 배우란 말인가? 너무나 많은 맹비난 때문에 토마스 하디는 붓을 꺾었다. 글을 쓰기를 포기를 했다. 그런데 79년 후에 1970년에 뉴욕에서 강간은 섹스가 아니고 성폭력으로 법이 바뀐 것을 보면 토마스 하디는 79년을 앞서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천재 예술가들의 예민한 촉감은 이미 언급을 한 것처럼 그들의 주장이 수십 년 후에 현실적으로 실현이 된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치료자가 강조를 하는 것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정신분석 치료에서 가장 핵심 적인 문제인 나는 순결을 잃었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나는 걸레가 되었다”, “나는 더럽혀졌다는 인식을 변화시키기 어려워서 정신분석가의 요청으로 강간은 섹스가 아니다. 강간은 가해자는 섹스행위를 한 것이지만 피해자는 섹스가 아니고 성기에 폭행을 당한 것이다. 성기에 폭행은 세월이 지나가면 아물게 되고 시간이 지나가면 몸은 회복이 된다. 예를 들어서 폭력으로 얼굴과 눈에 피 멍이 든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 피부가 원상으로 회복 되면 폭력으로 손상되었지만 정상으로 회복된 것으로 눈이 더럽혀졌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성기에 폭력을 당한 것은 세월이 지나가면 회복되고 순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처녀성은 순결하다 라는 점이다 라는 점이 성폭력 치료에서 핵심이다 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치료자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위와 같은 지식을 가지고 귀국을 했다. 이후에 실제 성폭력의 치료에서 어떻게 성폭력의 환자들을 치료를 해 왔는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환자는 약 20년 전에 치료를 하게 된 40대 초반의 우울증 부인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약물 치료를 약 5년 동안 받고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심리치료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했고 초등학교 5학년의 아들이 한 명 있었다. 6개월 치료 계약을 하고 1주일에 1회씩 2시간으로 심리치료가 시작되었다. 몇 번의 치료 회기를 거치면서 그녀는 여고 1학년 때 변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호소를 했다. 변소 공포증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낮에 여자 고등학교 학생으로 화장실에 무서워서 혼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가서 친구들이 화장실 앞에서 망을 보고 있고 그녀는 화장실 안에서 볼일을 보았다고 실토를 했다. 치료자가 변소에 가면 귀신이 나오는 혹은 어떤 남자가 변소에서 숨어 있다가 성폭행 혹은 여성의 성기를 훔쳐본다는 두려움인지? 를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험상 굳은 얼굴이 떠 올라서 공포스럽다고 이야기를 했다. 치료자가 그녀에게 변소 공포증과 관계가 된 기억나는 사건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러한 것이 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틀림없이 어떤 사건이 있었을 것이니 그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꿈 혹은 회상으로 떠 오를 수가 있으니 마음 속을 잘 들려다 볼 것을 주문을 했다. 그리고 만약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말 못할 비밀이 있다면 빨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몇 주일이 지나고 나서 그녀가 드디어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때 그녀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을 실토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에 조숙했고 키도 컸고 공부를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마침 새로 부임한 총각 선생님이 담임을 하게 되었고 5학년과 6학년을 연임으로 담임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에 부반장과 전교 부회장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중, 고등학교가 무시험 입학이 아니고 경쟁적으로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공부를 잘했고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제안으로 무료로 과외 공부를 한다는 말에 부모님이 안심하고 허용해준 것이 사건을 발단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의 하숙방에서 그녀가 공부를 배우면서 담임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게 된 것을 고백을 했다.

그 당시에 그녀는 담임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담임 선생님을 사랑했다고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그 담임 선생님은 그녀에게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의 담임인 여자 선생님으로부터 그녀의 성기를 입으로 빨개하고 성기를 만지게 한(페도필리아라는 변태성욕에 들어가 보라, 페도필리아(소아성애자)는 남자와 여자가 반반으로 여성들도 있다) 성폭력의 피해자였다고 고백을 한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성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치료자의 글을 보라). 그녀는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 길거리에서 담임을 만날까 두려워서 피해 다녔다고 했다. 그 후에 고교 1학년 때 변소 공포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찾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 공포증을 여고 1년 담임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선생님이 xx 교회를 소개 시켜주었고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 변소 공포증은 3년 동안 괴롭혔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사라졌다고 했다.

치료자는 그녀가 그 선생님을 사랑했다고 기억하고 있다는 말에서 그렇다면 중학교 입학 후에 왜 담임을 피해 다녔는지?를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는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족구성원들, 부모님 혹은 언니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후에 그녀가 결혼을 했고 남편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그녀가 겨우 11, 12살 때에 이미 어른이 된 남자 선생님이 그녀를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을 씌운 성폭행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여기에서 치료자가 변소 공포증의 원인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낮에 여고 변소에서 볼일을 볼 때 험상 굳게 생긴 남자의 얼굴은 바로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아닌가? 라고 지적을 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랬다. 틀림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성폭행의 피해자들이 마음 속에 억압된 살인적 분노를 지적하면서 그 분노를 행동이 아닌 말로써 표현해서 분노를 퍼 내야 한다는 말로써 그녀의 분노를 다루기 시작을 했다. 치료의 과정에서 여고 1학년 때 변소 공포증의 등장은 만약에 그 때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아서 그 공포증의 험악한 얼굴이 초등학교 5, 6학년 때의 남자 선생님의 얼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그 공포증은 쉽게 해결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때 총각 선생님인 남자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을 그를 사랑한 첫 사랑으로 포장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으로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져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3년 동안은 왜 조용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의식 속에 억압해서 세월이 지나가면서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변소 공포증으로 등장했는가? 라는 것은 쉽게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것이 나쁜 행동임을 감지하게 되었고 순결을 잃어버렸고 처녀가 아니다 라는 인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생리가 여고 1학년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로 초경이 빨리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하기 바란다. 농경시대에서 산업 사회로 옮겨 오는 100년 동안에 사춘기가 17-19세로부터 12-13살로 4-5세가 빨라졌다. 옛날에는 사춘기가 17-19(낭랑 18, 열여덟 살의 순정, 당신만 아세요,열아홉 살(19)이예요 라는 대중 가요를 보라)였기 때문에 그녀는 여고 1학년이 되면서 생리를 통해서 그 동안 억압된 섹스 문제가 등장을 했지만 그 기억이 스크린 기억으로 확실하지 않고 증세인 변소 공포증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왜 하필 화장실인 변소인가? 하는 의문은 곧 풀렸다. 변소에 가면 옷을 벗게 되고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지적에 그녀가 시인을 했다. 그렇다면 여고 졸업 후에는 변소 공포증이 왜 사라졌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고 떠났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본다고 해서 학교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삶의 의욕과 재능을 상실한 우울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을 부인이 깨닫게 했다.

 그녀는 약 2년 동안 치료자로부터 담임 선생님에 대한 분노를 퍼낼 수 있었다. 성기에 폭력을 당했다는 인식의 전환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고백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순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순결하다는 인식이 치료에 핵심으로 문제 해결에 원동력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초반기에 그녀는 첫 사랑으로 담임 선생님을 사랑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치료자가 그녀에게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부반장과 전교 부회장을 했다고 했으니 그 때 찍은 수학여행과 앨범 사진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가져와서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서 분노를 말로써 표현해보자고 제안을 했을 때 그녀가 동의를 했다. 그 다음 주일의 치료 회기에서 그녀는 그 때 담임과 찍은 사진들과 앨범들이 한 장도 없는 것을 알고 스스로 깜짝 놀랬다. 그녀가 일부러 없앤 것이 아니고 이사를 다니면서 결혼 후에 짐을 챙기면서 신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위키피아 참고)없어진 것이라고 했다. 치료자는 바로 그것이 그 담임 선생님에 대한 그녀의 무의식 속의 분노가 아닌가? 라고 지적을 했을 때 그녀는 100% 인정을 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 당시에 입시 전형으로 시험을 쳐서 입학한 명문 여고를 졸업하고 xx 에서 공무원으로 일을 하면서 많은 남성들로부터 구애를 받았지만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 처녀가 아니다 라는 두려움 때문에 좋은 신랑감 후보자를 스스로 거부했다고 털어 놓았다. 결혼을 한 남편은 그녀에게 몇 년 동안 구애를 한 남자로 그녀가 기대한 남편감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결혼을 했다고 실토를 했다. 2년 후에 그녀는 성폭행의 상처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고 남편의 지원을 받아서 심리상담가 전문가 과정을 밟게 되면서 새로운 희망과 삶에서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사례도 약 20년 전에 치료자가 귀국해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치료자의 심리학 강의를 듣고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찾아온 21세의 여자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친구 관계가 되지 않는다고 호소를 했다. 남자 친구관계인지?를 물어 보았을 때 여자친구 관계라고 했다. 남자 친구관계는 아예 접근조차 못한다고 털어 놓았다. 친한 여자 친구와 친밀한 관계가 벌써 세 번째로 파경이 되었다고 호소를 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서로 친해져서 아주 친한 사이가 되면 서로 대판 싸움으로 끝이 난다고 호소를 했다. 6 개월 치료 계약을 하고 분석 치료사 시작되었다. 치료가 약 4개월 정도 흘러갔을 때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와 6학년 때 가까운 삼촌으로부터 그리고 가까운 형부로부터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을 했다. 그 문제를 다루면서 살인적 분노가 다루어지기 시작을 했다. 그녀의 동료들과 관계의 파경은 쉽게 풀어질 수가 있었다. 즉 가까운 친한 친구와 친밀관계가 되면 될수록 그녀의 과거의 비밀이 탄로나기 때문에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임을 지적을 했을 때 그녀는 시인을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 비밀을 가족구성원들 혹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고백을 했다. 치료자는 친밀한 관계는 서로가 상대방의 내면의 속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가까워지면 질수록 자신의 비밀이 들통이 난다는 자아의 고통 때문에 스스로 방어로써 자아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분노를 퍼 내는 치료가 본 괘도에 이르게 되었다.

 치료자는 순결을 잃은 것이 아니다. 처녀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더럽혀 진 것이 아니다 순결한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약 2년 동안 치료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성폭행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그녀는 지금까지 대학생이 되어서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고 했다. 치료자는 그녀에게 순결하다 것을 확인시키면서 그녀의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그녀는 마음의 이미지가 자라나게 되면서 그녀가 용기를 가지고 남자 친구들과 접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몇 개월 후에 그녀는 세 명의 남자 친구와 가벼운 선후배 관계를 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런데 친밀관계에서 진전이 없다고 호소를 했다. 치료자는 그녀의 과거의 비밀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남자 친구들과 관계에서 친밀감이 형성되어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남자 친구에게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실토하고 스스로 고백하도록 제안을 했다.

 여기에서 그녀는 펄쩍 뛰었다. 남자들이 성폭행을 당한 여자들을 좋아하겠는가? 그러한 비밀 이야기를 듣고 나면 도망을 가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치료가 3개월 혹은 4개월이 지나가면서 그 문제를 뚫고 나가야 남자 친구와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말에 그녀가 조금은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치료자는 성폭행을 치료하고 있는 수 많은 정신분석가들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연구 결과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백한 후에 어떤 결과나 나타나는지? 를 한번 실험을 해 보자고 제의를 했다.

 지금 현재 가깝게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가 있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3명의 선배들이 있다고 했다. 그 선배들에게 솔직하게 그녀가 5학년, 6학년 때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한 상처를 이야기를 하도록 했을 때 그녀는 치료자의 주장을 반신반의 했다. 그 다음 주일이 치료 회기에서 그녀는 3 사람의 남자 선배들 중에서 2사람에게 솔직하게 고백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두 명의 남자 선배가 그녀에게 연인으로 사귀자고 프러포즈를 해 왔다고 즐거워했다.  그녀가 그 두 명의 선배에서 내가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네가 그러한 비밀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것은 나를 신뢰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이야기를 해서 이번에는 2명의 선배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고민에 빠졌다고 실토를 했다. 그녀는 그 선배 중에 한 사람을 선택을 했고 그와 연인 관계로 쉽게 발전을 했다. 그녀는 그녀의 내면 속의 비밀을 이야기를 하고 나서 숨길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두 연인 사이에 관계가 마치 3년 혹은 4년 정도의 기간을 거친 것처럼 껄그러움이 없고 자유롭고 편안한 관계가 되었다고 치료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녀는 3년 동안 치료자로부터 심리치료를 받은 후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취업에 성공을 했고 그 후에 결혼을 해서 지금은 자녀를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녀의 치료를 통해서 정신분석가들의 성폭행의 이론과 치료의 효과는 치료자의 치료 사례를 통해서 그 결과를 인정해준 사례였다. 정신분석가들이 성폭행은 순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라는 치료 이론을 개발해서 지금까지 수 많은 성폭행의 피해자들의 인격 살인과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작업에서 그 결과가 증명되는 사례였다.

 세 번째 사례는 지금 현재 치료를 받고 있는 48세의 미혼 여성의 치료 사례이다. 그녀는 2018 12월 달에 xx 종합병원에 공황장애로 1달 가량 입원을 했을 때 입원한 딸의 이야기를 어머니가 그녀의 친구인 한 아주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아주머니가 오빠의 죽마고우인 한 친구가 미국에서 심리치료를 공부해서 공황장애를 치료한다는 이야기를 그녀의 어머니에게 하게 됨으로써 그녀의 어머니가 치료자와 연결되어지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치료자에게 2시간 컨설팅을 요청하게 되었고 컨설팅 시간에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치료실에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와 약 20분 정도 간단하게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치료실 밖으로 나가고(치료자는 부모와 자녀, 남편과 부인을 함께 치료실에서 같이 2시간 상담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들어와서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치료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그녀는 말을 하기 싫다고 했다. 에너지 고갈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고 잘라서 말을 했다. 치료자가 공황장애가 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녀가 이곳에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강압으로 끌려 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지금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게 된 지가 8개월 정도 되었고 소화기관이 고장이 나서 먹으면 설사로 그대로 방출되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고 그리고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잠을 자려고 누워있으면 머리 속에서 기계소리가 들리고 아무리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을 들 수가 없고 눈을 감고 있으면 한번씩 흰색 옷을 입은 산발한 귀신의 영혼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그녀는 머리 속이 멍하게 되어 잠이 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샌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 라는 질문에 그녀는 8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심하게 시작된 것은 8개월 전부터 2018 9월 달부터 심해졌다고 했다. 치료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그녀는8년 전부터 xx한의사로부터 한약 처방을 받아서 잘 견디어 왔는데 작년 9월부터 한의사의 처방약이 효과가 없어지면서 한의사 쇼핑(이 의사 저 의사로 여러 명들의 의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을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의 xx 한의사는 한 달에 210만원의 치료비용으로 한약물을 복용하고 있는데 점점 효과가 없어지면서 아예 약물 자체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호소를 했다. 한의사에게 약물 효과가 없다고 호소를 했을 때 더욱 더 강한 약물을 처방해주어서 속이 더욱더 나빠져서 더 이상 약물을 복용할 수 없게 되면서 공황장애가 등장했고 약물을 복용하기 위해서 병원에 1달 가량 입원을 했고 공황장애를 막기 위해서 약물을 복용하고 있지만 공황장애도 위와 장의 소화 문제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치료자는 그녀가 치료를 받으려고 하는 의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감지를 하면서 지금 현재는 공황장애와 소화성 궤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심리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심리치료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했다. 심리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먹은 것이 해결되어야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을 지경이고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없는데 무슨 심리치료인가? 라고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치료자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돌려서 혹시 심리적인 고민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이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말하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그녀가 지금 3천만 원의 카드 빚을 가지고 있다고 실토를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지금까지 약 8개월 동안 그녀의 치료 비용으로 2천만 원을 지불했다는 말을 컨설팅 시작 때 어머니로부터 귀띔으로 치료자가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말하는 2천만 원인지 혹은 따로 3천만 원인지? 확인하려고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어머니가 지원한 2천만 원 이외에 또 다른 3천만 원이 있다고 고백을 했다. 어떻게 빚을 3천만 원을 지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한의사에게 처방 받은 약물들이 효과가 없게 되자 한의사들의 쇼핑을 하면서 카드로 약값을 결재한 것을 돌려 막기를 하면서 계속 대부업계로부터 27%의 이자를 갚다가 보니 이자가 복리로 붙어서 한 달에 100만원의 이자를 물어주고 있다고 고백을 했다. 그녀의 고백에 치료자는 그녀의 핵심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모르는 3천만 원의 빚과 한 달에 100만원씩 그리고 그녀가 운영하는 사무실에 임대료(그녀는 4개월 동안 몸이 아파서 사물실의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가 한 달에 46만원씩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 그녀에게 제의를 했다. 그러한 마음 속의 고민이 심인성질환 즉 심리신체적인 결과로 나타난 위와 장의 소화성장애와 불면증 그리고 공황장애는 그 시발점이 심리적인 상처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고 그 결과로 나타난 신체적인 증세들을 치료를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치료자는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어머니에게 3천만 원의 빚을 이야기를 하고 그 빚이 해결이 되어야 심리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펄쩍 뛰었다.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지원해준 2천만 원 이외에 3천만 원의 빚이 있다는 것을 알면 어머니가 기절해서 졸도할 것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치료자는 그녀에게 치료자가 그 비밀을 터뜨려줄 것이니 그녀는 눈을 딱 감고 참으면 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지금 터뜨리지 않으면 눈덩이처럼 이자가 물어나서 결국은 언제 가는 더 큰 폭발로 터질 것이라고 지적을 했을 때 그녀는 인정을 하고 치료자에게 동의를 했다. 치료가 컨설팅의 2시간을 넘어가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치료실로 불렀다. 2시간 동안에 딸로부터 대화를 통해서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핵심 문제는 심리적인 고민과 갈등으로 불면증과 위와 장의 소화성 궤양으로 그리고 공황장애로 나타난 것을 지적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놀라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나서 따님이 어머니가 지원한 2천 만원의 치료비용 이외에 별도로 3천 만원의 빚이 있다는 것과 그 이자가 한 달에 100 만원과 비워둔 사무실 비용으로 한 달에 46만원의 월세가 나간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가 노발대발하면서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라고 하는 것을 치료자가 막으면서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지금은 화를 내도 변화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에게 딸의 이야기를 수용해줄 것을 부탁을 했다. 어머니는 딸이 보는 앞에서 통곡을 했다. 2천만 원도 적은 돈이 아닌데 또 3천만 원이 있다고 하니 죽고 싶다고 했다. 딸의 컨설팅을 통해서 아버지는 4년 전에 암으로 투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위로 하면서 치료자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딸의 위와 장의 문제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설사로써 그리고 24시간 누워있어도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증 그리고 공황장애로 심장마비로 혹은 기절 졸도로 죽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은 모두가 심리적인 갈등과 고민 때문에 생겨난 신체적인 질환임을 강조하면서 먼저 3천만 원의 빚이 해결되어지지 않으면 심리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가족들과 연락을 해서(2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음)따님의 3천만 원의 빚을 갚아줄 것을 호소를 했다. 그 빚이 갚아지고 나면 치료자에게 정식 6개월 치료 계약을 요청한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컨설팅을 끝낼 수 있었다.

 그 다음 주일에 어머니는 딸의 빚을 갚아줄 준비가 되었으니 6개월의 심리치료 계약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고 치료자 시작되었다. 그녀의 분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의 삶을 분석하면서 그녀는 고교 2학년 때 수학여행에서 동료들 앞에서 춤과 노래로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녀가 고료 졸업 후에 대학 1학년 때 이벤트 회사에 취업을 해서 치어 리더로, 그리고 대학생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후에 xx 야구단의 치어 리더로 활동을 한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178cm의 키에, 단단한 매력적인 몸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대학 1학년 때 동료들의 부추김으로(이미 예정된 각본임이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스스로 술회)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xx 종교 단체에 가입을 했고 그리고 그 교주인 xx (그 당시에 40대 중반)에게 성은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성은을 입었다는 말이 성폭행을 당한 것이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그녀가 시인을 했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그것이 사이비 종교라는 것을 몰랐다고 고백을 했다. 그 종교가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예능과 예술적인 지원으로 토, 일요일에 무대에서 공연과 노래와 춤으로 젊은이들을 열광케 해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치료자가 약간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종교에 가입했다가 빠져 나와서 그 후유증으로 25년 전에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은 한 간호사의 치료 사례 때문에 그 종교를 약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종교에 빠져서 처음에 성은을 입었다는 말에 기고만장에서 하느님(예수님)의 은총을 입은 것으로 좋아했으나 3년 간의 그 종교를 추종하면서 그 종교가 사이비라는 것을 알되었고 마지막 1년 동안 빠져 나왔다고 고백을 했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 후에 세월이 20년이 흐르고 난후에 절실하게 느꼈다고 했다.

 이후에 이어진 분석 치료 과정에서 그녀는 사이비 종교와 결별하고 그 직후에 그녀보다 2살 위의 한 남성을 알게 되었고 2년 동안 그 남자에게 끌려 다니면서 학대를 당한 것을 고백을 했다. 그 남자가 그녀에게 섹스 관계를 하면서 그녀의 비밀을 이야기하게 만들었고 그녀가 xx 사이비 종교 교주와 섹스 관계를 가진 것을 알게 되면서 그 남자가 술을 마시고 섹스를 가질 때마다 너는 걸레 같은 년이다”, “너는 더러운 년이다”, 너는 처녀가 아니다”, 너는 썩은 인간쓰레기 이다라는 언어 폭력을 당하면서 2년 동안 끌려 다닌 것을 토로 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변명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순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아버지가 조폭에다 4명의 부인을 가진 폭력과 마약의 전과가 있는 아버지를 둔 사람으로 고교 중퇴로 그의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가려고 하다가 붙잡혀서 모래 밭에 파묻힌 이야기를 그 남자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 남자 친구의 과거의 27년 동안의 상처 받은 마음의 고통을 그녀에게 쏟아 퍼부은 것이 분석 치료 과정에서 드러났다.

 치료 회기가 14회기를 지나가면서 그녀는 치료실에게 살인적인 분노를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그녀는 장장 9시간을 울음으로 통곡하고 나서 그녀가 4개월 동안 문을 닫다 놓았던 사무실 문을 열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설사는 그쳤다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수면제 없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치료자가 그녀에게 인간의 마음이 신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제 치료자의 심리적인 이론과 원리가 첫 시간에 50% 정도 믿음이 간다고 한 것을 14시간 후에 이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많은 치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적극적으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자가 여기에서 인격 살인에 대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시에 그리고 대학생일 때 그녀는 자신감은 그녀가 스스로 100% 라고 자아 평가를 했다. 그런데 그녀의 핵심 문제는 공황장애가 아니고 성폭행으로 인한 죄의식과 자아 처벌과 섹스의 상처 때문에 계속해서 그 이후에 몇 명의 남자들과 관계가 파경으로 언어 폭력과 학대로 얼룩이 졌다 그 결과 그녀는 48세가 된 지금은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고(위와 장의 소화문제와 설사)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고(불면증) 그리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공황장애로 기절, 졸도 때문에 혼자서 외출을 할 수가 없어 어머니와 함께 치료실에 3회까지 동반). 48세인 성인 여성이 3살 먹은 어린이로 변한 것에서 치료자는 그녀의 상황을 인격 살인으로 그리고 살아서도 죽은 사람으로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이야기를 했던 산 송장이 아닌가?라고 지적을 했을 때 그녀는 인정을 했다. 그녀는 스스로 48년의 세월이 지난 이후에 심리적 기능이 마비된 유아라고 스스로 실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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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센골드(Shengold)의 저서, 영혼의 살인(1989), 일상생활의 망상(1995), 영혼의 살인 재방문(1999)

          : 그린슨(Greenson)의 저서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과 실제 1967), 정신분석의 탐색(1978)

          :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제 Ⅰ권(1953), 제 Ⅱ권(1955), 제 Ⅲ 권(1957)

          : 엘렌버그(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발견: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

          컨버그(Kernberg)의 보드라인 성격장애를 위한 전이 중심 심리치료(1998), 보드라인 조건들과 나르시즘 장애(1975), 심한 성격장애들: 치료적인 전락들(1993),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1980), 대상관계 이론과 치료적인 정신분석(1976). 보드라안 환자의 치료 제한을 확대(2000).

        : 오가덴(Ogden)의 마음의 모체(1986), 경험이 원시적인 끝지점(1986), 분석의 주체(1994), 몽상과 분석(1997), 꿈 전선에서 대화(2001), 정신분석의 예술(2005). 투사동일시와 심리치료 기법(1982).

          :바스크(Basch). 심리치료의 실제(1980), 심리치료의 이해(

          :에릭 에릭슨(Eric Erikson, 1950). 어린이와 사회

          :건드슨(Gunderson).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치료 사례(2001), 보드라인 성격장애(1984)

         :사피로(Shapiro, 1999: 주㈜: 참고)는 인격의 역동학(1999), 신경증 인격장애의 심리치료(1999)

          : 허만(Herman,1997)의 상처와 회복

          : 울프(Wolf, 1988). 치료되는 자아. 치료적인 자아 심리학의 요소들

          : 데이비스와 프라울레이Davies & Frawley, 1994). 어린 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어른들의 치료

          : 김종만(1999).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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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치료자가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소장하고 있으니 치료자의 홈 페이지 전문서적 안내란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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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치료 사례는 고교 시절에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3등을 한 학생으로 우리나라의 과학의 천재들이 모여있는 xx 대학에서 수학과에 입학했으나 대인관계에 대한 문제점 때문에 치료자에게 1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대학 4학년 학생의 치료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르코트가 살페트리에 병원에서 매주 화요일 전 세계의 명사들에게 히스테리아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하는 장면을 시범을 보이고 있다.

위의 관중 석에 프로이트가 1885 10월에 가르코트 학교에 6개월 연수를 하기 위해서 비엔나를 떠났고 그의 강의와 시범에 참석을 했다

 

대상: 20대 후반의 명문대학 수학과 학생인 A

증세: 약한 대인 공포증, 우울증

접촉: 군 내무반 시절에 치료자의 저서 "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읽고 치료를 결심하고 치료자를 찾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고심하다 인터넷에서 주소를 보고 전화 연락이 왔음

치료 기간: 1주일에 2회씩 1개월 간 치료를 받았음

치료 결과: 적어도 6개월의 치료를 권유하였으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너무 먼 거리에서 그리고 3학년으로 공부 시간 때문에 여름 방학에 다시 치료를 하기로 함, 1개월 치료 후에 A군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 처음으로 주의 집중이 잘 되어 공부에 스피드가 붙이 시작하고 정상적인 공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음

 

치료의 과정

A군은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 학교에서 군대식으로 공부를 하였다고 했다. 새벽 1-2시까지 공부를 했으며 동료들과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수학의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공부가 한 만큼 성적이 올라갔고 수학은 전교에서 1-2등을 다투었다고 했다.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대통령 상을 받기도 했다. 잠을 하루에 5시간 이상은 자지 않았고 결과도 좋아서 우리나라의 최고 명문대학 수학과에 합격하고 또 지금 자신이 다니고 있는 수재들의 대학교라고 이름난 지금의 대학에 동시 합격했으나 지금의 대학교를 선택하였다고 했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장을 하고 계시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여동생과는 사이가 친한 편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A군에 대해서 기대가 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를 계속하라고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해 왔다. A군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심하지 않았으나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부터 이성과의 사귐이 잘 안 되고 동료들과의 관계가 부진함을 스스로 느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들어가서 2 6개월 정도를 복무하고 나서 지금은 한 학기를 휴학하고 심리치료를 받으려고 준비를 해 왔으나 군대 내무반에서 읽었던 "성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책의 저자인 치료자를 여러번 수소문 했으나 찾지를 못하고 휴학 기간을 두 달 앞두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심리치료를 찾다가 치료자인 나와 연락이 되어 치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다. A군은 대학 입학 후 그리고 대학 1학년-2학년까지 고등학교 때의 수학 실력이 되살아나지 않아서 고통속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수학책을 보면 저절로 정신이 집중이 되었으나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어서 대학 입학 후에 1-2년을 그냥 그렇게 세월만 보내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한탄스러워 우울해져갔다. 군 입대 후에 훈련소 시절이나 졸병 시절에는 그래도 바쁘게 세월이 지나가다가 보니 언제 세월이 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으나 고참이 되고 시간적 여유가 많아 지면서 고통스럽게 자아 의식을 하게 되고 점점 우울한 마음이 많아져가게 되었다고 했다.

증세로써 A군은 이발소와 같은 직접 11의 대인관계를 하는 곳에 가면 상대를 의식하게 되고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진다고 했다. 백화점이나 옷 가계에서 옷을 살 때도 점원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워서 피하거나 어떤 때는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고 안절부절 해서 얼굴에 자신의 불안한 표정이 씌어있지 않나 하고 신경을 쓰다가 보니 자신의 자세가 경직되어 이상하게 보이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다. 즉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정신과 관련 서적들을 뒤져 보기도 하고 스스로 고치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치료자의 저서인 "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일고 나서 자신이 고등학교 때의 자신감을 상실해서 자신감을 다시 세우는 것이 우선임을 깨닫고 치료자를 찾으려고 치료자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xx 대학에 연락을 해 보았으나 그런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받고 포기한 상태에서 치료자의 홈페이지에 접하게 된 것이었다.

A군은 약간의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고 약한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내면의 고민들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약 4년 동안을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우선 치료자는 A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부모님에게 알리고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라고 했다. A군은 군대에서 제대후에 6개월간  쉬면서 알르바이트로 대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약간의 생활비용을 충당하고 있었으나 심리치료 비용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는 지금까지 부모님 특히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A군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어머니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러나 고민을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건강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난 후부터는 시골에 가서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모든 고민들 털어놓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인 A군의 고민을 듣고 나서 아들 A군을 부등켜 안고 둘이서 울음을 떠뜨렸다고 했다. 어머니는 A군에게 공부에 신경쓰지 말고 미국 유학을 가지 못해도 좋으니 그냥 편안하게 공부하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A군에게 심리치료 비용과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돈이 들어갈 터이니 용돈쪼로 50만원 손에 쥐어주었다고 했다.

A군은 치료를 시작한지 2주일 만에 집에서 가서 어머니에게 모든 고민과 고통을 털어놓고 나니 시원해졌다면서 1주일에 몇 번씩 찾아오던 우울함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공부에 집중은 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같은 라이벌 친굳가 인근에 거주하고 있어서 둘이서 스타디 그룹을 만들어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최근에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모두 이야기하고 나니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했다.

치료는 A군의 대화 스타일과 관계 스타일의 분석에서 A군이 지나치게 상대를 의식해서 말을 하기 전에 마음 속에서 한번 걸러낸 다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분석되어지고 실수와 완벽주의적인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도록 도와주었다. 치료자와 마주 앉아서 내면의 마음을 이야기할 때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단점을 먼저 이야기하도록 했다. 자신의 단점을 먼저 이야기하면 방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가 적게 소비되고 이야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 수 있게 된다고 인식을 시켰다.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이니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사과를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A군은 머리가 좋았다. 치료자와 마주 보고 앉아서 자신의 약점부터 먼제 이야기하는 심리치료의 대화 스타일이 바로 대인관계 스타일임을 알 게 되었고 편안하게 자신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치료 3주일 쯤에는 긴장된 강박증 의식이 감소 되어 편안하게 주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치료 결과: A군은 4주 정도 치료를 받고 난 후에 자신의 공부에 주의 집중이 증가된다고 기뻐했다.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모든 단점을 이야기하고 난 후에 여자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두 사람 사이에 껄끄러운 관계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관계로 변했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불안이 감소되고 우울함을 더 이상 재연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수학 공부에 3년 만에 처음으로 진도가 잘 나가게 되어 자신감이 증가한다고 했다.

A군은 3월달에 개학이 되어 복학하면서 학교 기숙사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치료를 받으러 오는 거리와 시간 때문에 다음 여름 방학에 다시 계속하기로 하고 치료를 중단하고 싶다고 했다. 위기에서 빠져 나온 느낌이어서 지금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치료자는 A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A군은 언제든지 급하면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아직도 대인관계의 핵심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주의 집중이 증가하면서 자신의 전공인 수학에 공부를 집중할 수 있게된 것이 자신감을 들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신감은 얼마나 지속될찌는 모르겠으나 당분간은 공부가 잘 되면 자신감이 증가하게 되어 급한 어려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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