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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실에서 자연스럽게 분석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영화 속에서 인용) 

 

 21세기는 자아의 시대 왜?

 

우리나라에서 1988, 5월에 개봉된 독일의 작가 권터 글라스(Gunter Grass)양철북(Tin Drum)(1999년 노벨 문학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 자아가 자라나기 시작한다”(2021, 6, 12: 다음 백과) 그리고 한 유명한 평론가가 한 작품을 논평을 하면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말과 그리고 또 다른 평론가가 또 다른 작품을 논평을 하면서 이 작품은 자아의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라는 문구에서 자아의 성장, 자아의 상실 이라는 말에서 필자는 이해가 어려웠다. 신체가 성장을 하는 것은 눈에 보인다, 유아기 시절, 어린이 시절, 청소년시절, 성인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체가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은 눈에 띄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자아가 성장한다? 라는 말을 익숙하지 않다. 필자가 미국 유학에서 10년간 가족 치료를 공부하고 나서 인턴쉽 이후에 정신분석학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알게 된 것이 정신분석자아에서 시작되고 자아에서 끝난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로써 보드라인 장애(경계선 장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건드슨(John Gunderson)이 쓴 저서(보드라인 성격장애, 1984)에서 21세기는 자아장애의 시대가 될 것이다 라고 예견을 했다. 프로이트는 정작 자아(self)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이 자아의 학문이 되었는가?  21세기가 왜 자아장애의 시대 인가? 그리고 심리치료의 과정에서 자아치료가 어떻게 응용되어지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자아(self)라는 용어의 진화를 살펴 보고자 한다. 자아라는 용어의 진화는 한가지 계통으로 발달한 것은 아니다. 크게는 일반심리학(심리과학)과 정신분석학에서 그 등장 과정이 다르다. 심리과학과 정신분석학의 등장은 계통이 완전히 다르다(상세한 것은 심리상담과 심리치료를 보라). 일반 심리학에서 발달 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심리학(I) 자아(self)연구이다. 인간의 마음의 연구가 아닌가? 정신건강의학 전문가들(신경정신과의사)은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뇌를 연구하고 약물로 치료를 하는 전문의사들이다. 뇌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심리과학의 창설자는 독일의 라이프지히 대학 생리학교수, 철학교수인 윌헬름 분트(Wilhelm Wundt, 1879)이다. 대조적으로 역동적인 정신의학을 연구를 하는 전문가들은 뇌를 대표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약물이 아닌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들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역동적 정신의학을 개척한 학 대표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인 시그문드 프로이트(Sigmund Freud), 스위스의 정신과의사인 칼 융(Carl Jung), 오스트리아의 내과 의사인 알프레스 에들러(Alfred Adler) 그리고 프랑스의 정신과의사인 피에르 장(Pierre Janet)이 있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 2로 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프로이트는 3개의 자아(원초자아, 현실자아, 초자아)로 구성되어진다고 이론화 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것이 잘 통합되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자아가 아니고 1개의 자아로 보인다. 그러나 양육의 과정을 통해서 심리적인 상처로 인해서 3개의 자아가 고르게 발달하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고 균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신경증 환자들로 이론화 했다. 원초자아가 전체 자아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 주로 양심이 부패한 사람들, 충동적, 폭력적인 사람들, 성 범죄자들 등으로 주로 범법자들이 많다. 반대로 초자아(양심)가 전체 자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우울증 환자들로써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자아를 처벌하는 사람들이다. 현실자아(ego)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에 부적응으로 관계에서 어려움, 갈등을 피해서 도망가는 사람들, 뿌리가 흔들리는 사람, 공허하고 외로운 사람,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이 바로 자아 장애자들이다(아래의 전개되는 자아 장애를 보라).

 뇌를 연구하면서 자아(self)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학자는 영국의 신경학자인 휴글 잭슨(Hughling Jackson)으로 보고되고 있다(Mearles, 2012: 주㈜: 참고). 그는 뇌 안에서 작동하는 마음을 내면적인 마음(신경학적인 마음)외부적인 마음(심리학적인 마음)으로 구분을 했다. 그의 논문은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로 미국에서 심리학을 처음을 강의 한 윌리엄 제임즈(William James)에게 알려져서 제임즈가 자신의 연구 모델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직접 영국을 방문을 해서 잭슨을 수 차례 만나게 된다. 윌리엄 제임즈는 1890년에 심리학의 원리라는 저서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심리학의 대가로써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프로이트와 제임즈는 서로 소통을 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1909년에 클라크 대학의 20주년 개교 기념식 때 총장이었던 스탠리 홀(Stanley Hall)의 초대로 융(Jung)과 함께 정신분석학과 치료에 대한 1주일 동안 특강을 했을 때 은퇴한 노장으로써 윌리엄 제임즈가 그 특강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었다(Ernest Jones, 1953, 1955, 1957). 제임즈는 잭슨과 유사하게 외부적 자아(I)내면적 자아(Me)로 구분을 했다.

이후에 이 구분은 정신분석가인 칼 융(Carl Jung)으로 이어져서 공적인 자아(public self)사적인 자아(private self)로 이어지게 된다. 융은 페르소나(persona)이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페르소나 라는 말을 그리스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쓰는 가면을 지칭하는 그리스 말로써 이것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관계를 하는 자아 공적인 자아개인의 사적인 생활을 대표하는 사적인 자아로 구분해서 각각의 특징들을 연구를 했다. 이것이 이후에 페르소나가 명사로 연결되어 영어의 성격(persona + lity = personality)으로 이어지게 된다. 드디어 1980년에 등장한 DSM-Ⅲ에서 인간의 성격을 10개 나누어서 각각의 특징들과 장애들로 구분되어 분류되고 치료되어지게 된다.

이것이 심리학과 신경학의 통합으로 다시 연결되어지게 된다. 2010, 뇌와 자아 라는 유명한 저서(self comes to mind: construction of conscious Brain)에서 뇌 신경 심리학자로써 철학, 심리학, 신경학자인 남가주대학(UCS)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로 연결되어 뇌영상 자아심리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PET(양전자단층촬영)을 통해서 뇌 이미지 영상학으로 사고와 생각을 할 때 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색깔로 보여주는 뇌 에너지 이미지를 통해서 자아의 위치가 뇌 속에서 시각전전두엽인 P3a로 정의를 하고 있다(Mearles, 2012).

 정신분석학에서 자아(self)의 치료와 연구는 위의 계통과 약간 다르게 발달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자아(self)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버드 의과 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모델(Modell, 1985: 주㈜: 참고)은 그의 저서인 사적인 자아에서 프로이트는 자아(self)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아가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객관화와 실험적인 용어로써 ego라는 말로써 사용을 했다. 현실적 자아는 방어기능, 학습기능, 조정기능, 적응기능,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을 하는 기능으로써 객관적으로 측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독일어로 정신분석을 썼다. 그런데 정신분석의 정통은 영어로 원본이 되고 정신분석의 대가들이 독일에서는 거의 없다(심리과학은 독일의 분트에 의해서 탄생).

여기에 대해서 잠깐 노트해보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특이하게 유태인들이 많았다. 3회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독일의 와이마르(Weimar)에서 1911, 9, 21 - 22까지 이틀간 열리게 되었을 때 전 세계에서 정신분석학회에 등록해서 참가한 회원이 모두 55명이었다. 그 중에서 영국인 어네스트 존(Ernest Jones), 스위스인 융(Jung)과 신부인 오스카 피스트(Oska Pfister) 그리고 미국인 오르벤드로프(C.P. Oberndorf) 4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유태인이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알고 유태인 학회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 1, 2, 3회의 국제정신분석 학회 회장을 유태인이 아닌 융(Jung)에게 맡도록 했다.

이후에 나치가 정권을 잡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게 되면서 비엔나가 나치의 점령하게 들어가게 된다. 유태인 말살 작업이 시작되면서 나치가 정신분석은 유태인 학문이라고 발표하고 독일 내에 있는 정신분석 서적과 논문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회가 금지되고 프로이트 재산이 압수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치의 SS대원(나치의 비밀 특수 경찰)이 프로이트 집에 강제로 침입해서 안나 프로이트를 경찰서에 연행하고 프로이트 집을 수색을 했다. SS 대원들은 프로이트의 반나치의 증거를 찾으려고 했다. 그 때 프로이트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상당한 량의 현금을 압수해갔다.

안나 프로이트가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어네스트 존에게 연락을 해서 어네스트 존이 오스트리아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영국인 어네스트 존은 정신분석은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의 학문이 아니고 세계적인 학문으로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이름으로 구명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는 영국인으로 나치에게 외국인의 대우를 요청했고 독일의 영국 대사와 그리고 미국 대사에게 그리고 파리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프랑스 대사에게 연락으로 안나 프로이트를 석방시키고 프로이트의 구명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얼마 후에 나치는 아리안 순수 혈통이 아니면 전문직종 즉 의사, 정신과의사를 금지시키는 법을 통과 시키게 되면서 독일에서 정신과의사들과 정신분석가들이 대거 영국으로 혹은 미국으로 탈출하는 기독교의 유태인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출국처럼 그리고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기독교인들이 전 세계로 탈출해서 복음의 씨앗이 된 것처럼 정신분석가들이 북미와 남미로 흩어지면서 정신분석이 전 세계로 확대되어지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프로이트가 독일어로 쓴 정신분석은 영국인의 번역으로 번역서인 영국의 정신분석이 세계적인 표준이 된 것이다. 지금 독일 내부에서 정신분석은 연구하고 치료를 하려고 하는 독일인들은 영국의 정신분석 정본을 다시 독일어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모순이 생겨난 것이다(Ernest Jones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프로이트의 전기 서적을 보라)

이것이 영국과 미국에서 정신분석의 대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지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프로이트와 영국과 그리고 정신분석과 관계는 프로이트의 어린시절과 관계되어져 있었다.

 프로이트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는 세계 제 1 차 대전 이전에 오스트리아-항가리 2개의 왕국으로 유럽에서 합스부르그 (Habsbury) 가문을 바탕으로 한 최대의 강국으로 수도 비엔나(독일어로 빈)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프로이트는 지금의 체코의 모라비아(그 때는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출생 후에 3살 때 비엔나로 이사를 오게 된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첫 결혼에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40대 초반의 아버지는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하면서 두 번째 결혼에서 21세의 프로이트의 어머니와 결혼으로 장남으로 프로이트가 태어나게 된다. 어머니가 결혼을 할 때 그 때 전처의 장남인 아브라함은 21살로 결혼을 이미 했고 1살 난 아들 존(John)이 있었다. 둘 째 아들인 필립이 17살로써 프로이트의 21살 엄마와 비교가 되었다. 프로이트의 엄마와 이복 형님 필립 사이에 상상적인 관계에서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이 태어나게 된다(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쓴 Ernest Jones을 보라).

3살 때 비엔나로 이사를 오면서 이복형님들 가족 즉 아브라함과 필립은 영국의 만체스트로 이민을 갔다. 그 이후에 프로이트가 고등학교 학생일 때 만체스터의 형님 집을 방문을 했다. 프로이트는 이복 형님들과 사이가 좋았다, 그는 유태인의 박해가 없는 영국을 동경했다. 그리고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83살 때까지 비엔나에서 살았다.

나치의 유태인 박해가 다가오면서 제자들이 이민을 권고 했을 때 그는 죽을 때까지 비엔나에서 죽을 것이라고 거부를 했다. 그런데 정작 나치가 유태인 출국을 금지시키면서 제자들의 구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신경과 의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이 중심이 되어 프로이트의 제자로 그리스와 덴막의 공주인 마라아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 그리고 미국인으로 안나 프로이트와 의형제로 프로이트의 식구가 된 도토리 버밍험(Dorothy Buringham) 부인이 함께 프로이트 구하기에 발벗고 나서게 된다.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로써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흥미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정신분석을 했던 대통령과 절친했던 프랑스 미국 대사인 윌리암 불리트(William Bullitt)가 미국 대통령에게 연락해서 워싱턴에 독일 대사에게 프로이트의 구명을 요청을 했다. 결국 나치는 프로이트 의 가족과 그리고 관계된 주치의를 포함 직계가족만 추방명령을 내렸다.

그는 어린시절에 동경했던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영국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2년 동안 영국에서 거주하다가 2차 세계 대전 발발 1주일 전에 1939, 9월에 사망했다. 그는 1923년에 구강암으로 16년 동안 32회의 수술로써 진통제 없이 정신분석학의 집필을 했다 그의 유해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영국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4명의 여동생 가족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가스실에서 희생되었다(Ernest Jones, 1953).

프로이트가 쓴 독일어 정신분석을 영국의 작가이자 문필가인 제임스 스트라취(James Strachey)가 프로이트 밑에서 2년간 정신분석을 공부한 이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1세대 정신분석가들을 정신분석 학교가 없었다). 그가 프로이트의 허락을 얻어서 독일어의 모든 정신분석 서적을 영어 번역으로 유일하게 독점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프로이트가 쓴 독일어의 Ich Itch는 영어의 용어가 없었다. I, Me, self는 영어가 있었지만 프로이트의 원초자아, 초자아, 현실자아라는 용어는 I Me self와 다르다는 것을 스트라취가 간파한 것이다. 자아 안에서 세분화 된 3개의 자아는 Self I와 달랐다 고로 스트라취가 이것을 ego id로 신조어로 번역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 날 정신분석의 정본이 된 것이다.

그런데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Ego self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둘 다 자아로 번역되어진다. 코호트의 자아심리학(self psychology)안나 프로이트와 하트만 그리고 에릭슨이 ego 심리학(ego psychology)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줄 다 자아 심리학이 된다. 이러한 혼란은 비엔나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하트만(Hartmann) 1937년에 ego 심리학 의해서 해결이 되어지게 된다. 하트만은 ego는 자아 안에서 행정기능을 하는 현실자아로 그리고 self는 나와 너(object)의 구분을 하는 자아로 구분을 하면서 해결이 되었다. 필자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self는 자아로 그리고 ego는 현실자아(ego)로써 번역해서 구분을 하고 있다.

이제 21세기가 자아의 시대로 변화하게 되었는가? 로 방향을 바꾸어보자.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미래의 구상이 한 몫 하게 된다. 100년 전에 프로이트의 천재성이 여기에서 드러나게 된다. 프로이트는 그가 창조한 정신분석이 의학에 의해서 잡아 먹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신분석가들을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에만 국한 시키지 않기로 했다 즉 의사들이 아닌 사람에게 개방을 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해서 전문가가 된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유럽의 정신분석은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일반 전문가(lay analysis – 프로이트가 명명한 일반 분석가)가 전체 정신분석의 40%를 차지한 것이 이것을 말해준다(Ernest Jones, 1953).

대표적인 분야가 예술학 분야였다. 화가, 조각가, 음악가, 작가 그리고 평론가 등등이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들이 많다. 그들 가운데서 어네스트 크리스(Ernest Kris)는 비엔나 대학에서 예술학 박사 출신이다.

또한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면 누구나 투사심리 검사지인 TAT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즉 심리측정과 검사에서 TAT(주제 통각 검사지)와 로샬 잉크방울 검사지를 배우게 된다. TAT를 디자인한 장본인 크리스티나 몰간(Christian Morgan)하버드 대학에서 예술가, 작가, 정신분석가로써 근무하면서 헨리 머리(Henry Murry)와 연인관계가 된다. 그녀는 스위스에서 융(Jung)으로부터 분석 치료를 받고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이었다.

머리는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가 흥미가 없어서 다시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가 적성에 맞지 않음을 알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가 되어 뉴욕의 록펠러 대학에서 생화학 교수로 있었다. 그녀가 뉴욕에서 외향적/내향적 성격 그룹(1920년대)에서 그를 알게 되면서 그에게 스위스의 융(Jung)을 소개를 했다 그녀의 소개로 그들이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는 융(Jung) 한데서 개인분석과 치료를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는 이미 결혼을 했었기 때문에 부인과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연인 관계는 지속이 되었다. 그가 연인 관계에서 겪은 갈등이 동기와 갈등과 힘의 이론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성격의 요소 이론으로 1938년에 성격탐색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유럽에서 돌아와서 하버드 대학 심리치료 센터(Psychology Clinic) 소장으로 11년 동안 근무하면서 그가 정신분석 교육과정을 하버드 대학에 소개를 했다. 그는 1932년에 보스톤 정신분석 학교의 설립에 동참을 했다. 몰간의 제의로 시작된 두 사람의 협력은 화가였던 몰간의 자신의 어린시절의 우울한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녀가 그린 그림들이 수정이 되어 TAT의 원본으로 사용되어 1943년에 헨리 머리와 몰간의 TAT로 출판되었다. 그는 정신분석의 자유연상과 상상을 통해서 한 개인의 현재의 행동을 과거의 성장 경험을 통해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인간의 내면의 탐색의 길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그 출판은 하버드 대학의 출판사상 두 번째로 큰 수익을 가져오게 한 대 사건이 되었다(2021,6, 12: 위키피아).

몰간은 이후에 TAT에서 학술적인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제외시켜달라고 요구를 했고 지금은 TAT 검사지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헨리 머리의 1938년에 그의 저서인 성격의 탐색은 정신분석 이론을 무의식적인 자유연상과 상상을 통해서 인간의 성격의 일면을 끄집어내는 이론으로 그리고 그의 성취, 소속감과 힘을 포함한 욕구 조직이론이 그의 제자인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데이비드 맥클랜드(David McClellend)성취동기 이론으로 확대되어 심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의 효율 관리 모델 연구에 사용되어지게 된다. 머리와 몰간이 개발한 TAT 검사는 지금도 심리치료에서 인기리에 사용되어지고 있다(2021, 6, 12: 위키피아).

두 번째 분야는 영문학 박사들이 정신분석에 뛰어들게 된다. 대표적인 학자가 버클리 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신분석 인류학을 그리고 뉴욕의 버팔로 대학에서 어른 심리치료 대학원 프로그램과, 동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크리스토프 볼라스(Christopher Bollas, 1987: 주㈜: 참고)가 있다. 그는 에릭 에릭슨(Eric Eriskon) 한데서 개인 수련의 분석을 받고 정신분석가가 된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타비스톡 클리닉(Tavistock Clinic)에서 정신분석 대가들을 만나게 된다. 애착 이론의 존 볼비(John Bowlby), 반전이의 폴라 헤이먼(Paula Heimann), 프랑스 정신분석가인 앙드레 그린(Andre Green), 영국의 크레인 학파로 정신분열증 연구에 개척자가 된 헨리 로젠필드(Herbert Rosenfeld),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인 정신분석가 아돌드 모델(Arnold Modell)을 만나서 그들의 이론들을 흡수하게 된다. 그는 영국에 귀화해서 영국인이 되었다. 볼라스는 대상의 그늘(1987), 인격체로써 존재(1997), 사물의 신비(1999)의 저서는 필자가 번역으로 소장하고 있다. 그는 3개의 소설과 그리고 5개의 드라마를 출판한 작가로써 그리고 정신분석가로써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가장 현학자로써 인정받고 있다(2021, 6,13: 위키피아).

세 번째는 비엔나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세이그필드 베른필드(Siegfried Bernfeld)이다. 그가 소련의 철학자인 유리네트(V. Yurinet)와 함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토픽에 토론을 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프로이트-마르크스의 철학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후에 프로이트-마르크스 철학은 프랑스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파리 솔본 대학의 철학교수인 파울 리코에르(Paul Ricoeur)가 프로이트와 철학: 해석학 논문으로 현상학과 해석학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된다. 해석학과 언어 철학자인 한스 가다며(Hans-Georg Gadamer), 솔본 대학 교수인 장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파리의 정신분석학교 출신으로 멜라니 크레인의 정신분석 논문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정신분석가인 마구아레트 아우쿠투리(Marguerite Aucouturier)와 결혼을 했다. 데리다는 정신분석학, 해석학, 철학, 현상학. 존재론, 인식론 등에서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철학의 세계적인 대가로써 인정받게 된다.

베른필드는 사회주의적 정신분석가 그룹을 만들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정신분석에 확대시켜다. 비엔나 의과대학 정신의사로 그리고 과격한 정신분석가가 된 빌헬름 레이크(Wilhelm Reick)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정신분석가 들 중에서 최초로 인격분석(1933)과 파시즘의 대중 심리학(1933), 섹스 혁명(1936)을 쓴 정신분석가로 베를린에서 노동자를 위한 정신분석 치료소를 설립을 했다 이후에 나치를 피해서 뉴욕으로 망명해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멕카시즘에 투옥되어 감옥에서 사망한 불운의 정신분석가이다.

독일의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인 에릭 프롬(Eric Fromm)이 있다. 그는 독일에서 정신과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프리다 레이크만(Frieda Reichmann)한데서 정신분석 수련을 받다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게 된다. 이후에 한스 샤크(Hanns Sachs) 한데서 정신분석 수련의 완료로 정신분석가 된다. 나치를 피해서 뉴욕에서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면서 셀리번(Sullivan)호르니(Horney)레이크만(Reichmann)과 함께 프로이트의 이론에 사회, 문화적인 요소를 첨가해서 신프로이트 학파(Neo-Freudian)탄생시키게 된다. 1943년에 뉴욕에서 윌리엄 알선 하이트(William Alanson White Institute) 정신분석 연구소를 설립해서 뉴욕의과대학 대학원 정신분석학교로 공존하는데 공헌을 했다.

네 번째로 수학자, 물리학자들이 정신분석학자가 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항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석사 그리고 심리학과 철학박사인 데이비드 라파포트(David Rapport)이다. 그는 정신분석 이론에 물리학의 열역학 이론인 Thermo-Dynamic 이론을 psycho-dynamic, 심리역동학으로 뉴톤의 제 1 법칙인 정지한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하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해서 움직이려고 한다는 힘의 법칙에서 정신분석에서 변화에 대한 저항 이론으로 그리고 제 3의 법칙인 작용 대(vs) 반작용의 법칙에서 정신분석의 반대행동 형성(Reaction-Formation) 방어이론 등의 물리학적인 이론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물리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 자신은 독일 라이프지그 대학 실험물리학자인 구스타브 페크너(Gustave Fechner)심리물리학의 저서에 크다란 영향을 받았다(심리과학의 탄생을 보라).

다섯 번째로 언어학 박사들이 정신분석가 된 사람들이 있다.  컬럼비아 대학 정신분석학 교수인 로이 샤프(Roy Schafer, 1976, 1983, 1993, 2003: 주㈜: 참고), 뉴저지주립대학의 교수인 도날드 스펜스(Donald Spence, 1982: 주㈜: 참고), 시카고대학 그리고 시카고 정신분석학 교수인 어윈 호프만(Irwin Hoffman, 1998: 주㈜:참고) 등이 서술을 강조하는 언어 정신분석가들이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구아레트 세게하이(Marguerite Sechehayse)가 있다. 그녀는 제네바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로 그리고 이후에 프랑스의 언어학의 대가인 소슈르의 구조주의 언어 그리고 루소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신경학자로써 아동심리학의 아버지가 된 에도와르 클라라파드레(Edouar Claparede)의 조수로 있다가 그의 소개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가로 변신을 하게 된다.

클라라파드레는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에서 의학과 신경학을 전공하고 파리의 가르코트(Charcot)의 최면학교인 살페트리(Salpetriere)에 병원에서 전문의가 된 후에 세계적인 신경학자로써 미국의 병리심리학회의 이사로 선정된 4명의 명사의 한 사람 이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부르고졸리 대학정신병원의 4대 총장인 유진 블루러(Eugene Bleuler), 프로이트(Freud), (Jung), 그리고 클라라파드레(Claparede)이다.

세게하에는 클라라파드레의 조수로 있다가 정신분석가가 된 후에 정신분열증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인 정신분열증환자를 치료 정신분석적으로 치료를 하면서 르네의 일기를 치료 사례로 남기면서 정신분열증의 내면 세계를 소상하게 밝혀서 정신분석가들의 정신분열증 치료에 새로운 길을 열어놓게 된 개척자이다. 그녀의 연구는 정신분열증의 공헌자들 중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섯 번째로 철학자, 특별히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정신분석학자가 된 사람들이다. 이번에 필자가 새롭게 알게 된 이 실존 철학정신분석에서 자아(self) 심리학의 이론에 기초를 제공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소상하게 소개를 하고자 한다.

실존 철학의 아버지는 쇼렌 케이르키에골(Soren Kierkegaard)이다. 그는 덴막의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 박사를 받은 사람으로 목사가 된 사람이다. 그가 철학자로 변신을 해서 실존 철학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니체보다 40년 먼저 그리고 프로이트 보다 50년 일찍 등장하게 된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가 불안과 관계된 사람들이다. 불안과 공포, 두려움에 대한 인간존재의 문제를 등장시킨 첫 실존 철학자가 케이르키에골 이고 인간의 내면의 심각한 불안과 공포를 신은 죽었다 로서 상징적 은유로써 외친 철학자가 프레드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이다. 과학의 발달이 신의 존재의 불신으로 인간에게 재앙을 예견한 사람이 철학자 니체이고 그리고 불안증의 치료법을 개발한 사람이 프로이트 이다(Rollo May, 1950).

프로이트는 케이르케이골의 논문을 접촉하지 못했다(Rollo May, 1950, 1953: 주㈜: 참고) 그러나 염세주의 철학자 아더 쇼펜하우엘(Arthur Schopenhauer)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하루도 전쟁에서 벗어난 날이 없고 미래가 전쟁과 재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라는 염세주의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다(Ellenberger, 1970).

1890-1910년의 20년 동안 유럽의 젊은 지식인들을 열광시킨 프레드히 니체는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1 때 스위스의 바셀 대학에서 그리스어 고전어 연구 교수로써 출발했다. 이후에 철학자로 변신을 했다.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유명한 우화를 소개하고자 한다(Rollo May, 1953, 자아를 찾아서 에서 인용).

 

한 미친 듯이 보이는 젊은 청년이 어느 마을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신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세요라고 외쳤다. 마을 사람들은 신은 이민을 가고 없다”, “신은 여행을 떠나고 없다라고 말을 했다. 이 때 그 젊은 청년이

신은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였습니다”,

무지개가 신의 약속이 아니라 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천둥과 번개가 하느님의 노여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신은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발 밑에 있는 허무를 보세요.”


 동네 사람들이 그 미친듯이 보이는 젊은이의 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내가 너무 빨리 왔나?” 하고 웅얼거리면서 그 마을을 떠나갔다.

 

중세의 1천 년은 기독교 시대였다. 필자가 어린시절에 시골에 살면서 높은 산에는 산신(산신령님), 큰 나무에는 목신(나무 신), 큰 바위에는(석신: 바위 신), 바다에는 용왕님(바다 신), 땅에는 지신(땅의 신)으로 범신론적인 믿음을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대한 큰 사물들에는 모두 신령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함부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는 하느님의 처벌과 노여움으로, 모진 놈은(죄를 지은 나쁜 사람의 뜻)벼락맞아 죽는다 라는 금언을 믿었다.

니체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기고 만장해서 자연의 숭배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정복하고 그리고 자연을 파괴하게 되면서 거대한 재앙을 예고를 했다(니체는 1900년에 사망). 그것이 바로 1914년에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로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의 무장단체의 한 청년에게 암살됨으로써 전쟁이 발달해서 1918년까지 4년간 계속된 제 1 차 세계대전1939 9 1일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어 1945 9월까지 6년 동안 지속된 제 2 차 세계 대전이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과 독일과 그리고 이태리 3국 동맹과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3국 동맹들에 전쟁을 하게 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이들이, 나중에 미국이 영국의 편에 가담함으로써 전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결과 850만 명의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희생이 되었다(2021, 6, 12: 위키피아).

2 차 세계 대전은 나치 독일이 1939년 9 1일에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에 일본과 이태리가 나치에 합류하고 영국과 프랑스 소련 그리고 미국이 연합국에 가담함으로써 세계 대전으로 발발을 했다. 그 결과 제 1 차 세계 대전의 재난의 10배에 해당하는 8 5백만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희생 되었다(2021,6, 12: 위키피아).

중세의 1000년은 기독교 시대였다.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 무지 그리고 미신으로 역사가들은 어둠의 시대dark ages라고 부른다. 18세기의 계몽주의로써 과학의 발달, 이성의 회복, 학교가 설립되어지고 교육으로 합리주의의 결과로 산업혁명의 도래는 인간을 미신과 무지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러나 대신에 신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인해서 키에르케이골과 니체는 공통점이 신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다시 신의 믿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고 천명을 했다. 대신에 그들이 주장한 것은 자아의 발견이었다. 신의 믿음의 불신에서 오는 신에 의존에서 자아의 뿌리를 찾는 자아의 발견을 외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키에골의 실존주의 철학이었다.

니체는 유명한 명언을 많이 남겼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자아를 찾는 것이다. 자아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발견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보물을 발견하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자아를 찾는 것이다. 신의 믿음의 상실에서 오는 불안, 두려움은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삶의 방향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의 청사진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리스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신전에 조각되어져 새겨져 있는 소크라테스 명언은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문구를 가장 좋아했다. 그는 그리스와 이태리 여행을 생전에 7 차례로 방문을 했다. 그의 취미가 그리스의 골동품 수집이었다. 그가 수집한 골동품들을 제자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다. 롤로 메이(Rollo May)는 그의 저서 자아를 찾아서 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 내팽개쳐졌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키에르키에골과 니체의 실존철학은 독일의 신학박사로 목사가 된 뒤에 철학자가 된 마틴 하이데거(Martin Hildegard)에 의해서 계승되어졌다. 그는 현대의 실존 철학자로 그의 실존 철학을 일상생활로 확대시킨 사람이 바로 장볼 싸르트르(Jacques Paul Sartre)이다. 그는 실존을 being in the world로서 존재의 허무(nothing)으로써 인간이 존재의 무()에서 살아있음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루에 8시간씩 일을 하면서 살아가다가 보면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감을 느낀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삶이 진실된 것인가? 왜 내가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냥 짜여진 각본대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보니 삶의 방향을 상실한 것이다.

어느 날 내 자신이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다.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내 주변의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내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돌아이로 보는 것 같이 느껴지고 도망치고 숨고 싶어진다. 내 뒤통수에다 대고 미친놈이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느껴진다.

소설가 비평가 실존 철학자인 싸르트르는 1938년의 그의 작품 구토에서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늘 익숙하던 세상이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지고 메스껍고 구토가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들이 나를 보고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서 도망치듯이 집으로 방으로 숨어버리고 두문불출하게 된다.

내가 삶을 컨트롤하고 내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삶을 컨트롤 당하고 내가 내 의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끌리어 들어가서 조작 당하고 이용당하고 강압을 당하는 것으로 조종당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실존철학자가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들이 바로 스위스의 제네바 의과대학 정신과의사로써 실존 철학자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루드위그 번스윙그(Ludwig Binswanger)이다 그리고 미국의 치료 심리학자, 실존주의자인 롤로 메이(Rollo May)이다.

루드위그 번스윙그는 스위스의 정신분석 학회의 (Jung)이 정신분석 학회를 탈퇴하면서 스위스 학파들이 모두 융을 따라서 탈퇴 했을 때 잉크방울 테스트(Inkblots)를 개발한 정신과의사 이자 정신분석가인 허만 로샬(Hermann Rorschach)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서 스위스 정신분석 학회를 재건했다. 로살이 37세로 요절했다는 소식에 프로이트가 애통해 했다.

번서윙그는 실존철학을 정신분석에 접목해서 거식증 환자의 치료 사례로 유명한 엘렌 위스트(Ellen West)의 사례를 남겼다.

롤로 메이는 유니온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자, 목사가 되었다가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치료 심리학을 전공해서 치료 심리학자가 되었다. 그는 알프레스 에들러(Alfred Adler) 한데서 개인분석을 받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미국에서 루터교 신학자이자, 실존주의의 대가로써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하버드대학 신학교, 시카고대학 신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한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한데서 영향을 받아서 실존주의 심리치료사가 되었다.

 특별히 칼로져스(Carl Rogers)와 마슬로우(Maslow)와 함께 인본주의 심리학 운동을 일으켜서 인본주의 심리학의 리더가 되었다. 그의 저서인 불안의 의미1996), 자아를 찾아서(1953)가 있다. 그는 1971년에 캘리포니아 소노마(Sonoma) 주립대학에서 인본주의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독립해서 2009년에 캘리포니아 L.A. 지역에 있는 파사데나에서 세이버룩(SayBrook) 인본주의-실존심리치료 대학원 학교를 동료들과 함께 설립했다.

이 학교는 대학원 중심의 대학교로서 인본주의 심리치료학과, 카운슬링학과, 코칭 심리학과, 응용심리학과, 리더십-경영학과와 경영행정학과(조직, 산업심리학)과 그리고 몸과 마음의학과, 심리생리학과 등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배출하고 있다(2016년 현재, 대학원 재학생이 622명 그리고 222명의 강사들과 교수의 포함). 미국서부지역 대학연맹과 캘리포니아주에서 인가된 대학원이다(2021, 6, 13: 위키피아).

자아를 찾는다는 말은 정신분석에서 단골 메뉴가 되었다. 롤로 메이자아를 찾아서(1953)라는 저서뿐만 아니라 뉴욕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인 제임즈 마스터슨(James Masterson: 주㈜: 참고)의 저서인 참 자아를 찾아서 (1988)라는 저서가 있다. 그리고 빅톨 프랭클(Viktor Frankl)삶의 의미를 찾아서 (1946)가 있다.

특별히 비엔나 의과대학에서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이후에 정신분석가가 된 빅톨 프랭클(Viktor Frankl)이 있다. 프랭클은 인간 존재의 핵심 동기는 바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고교 시절에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 심리학 그리고 정신분석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비엔나 의과대학에서 신경학,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그가 정신분석가 되어 국제 정신분석학 논문집에 첫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그는 자살과 우울증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비엔나 청소년 자살문제에 뛰어들어서 비엔나 시에서 지원해주는 청소년 무료 자살 예방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운영했던 자살 예방 청소년 무료 프로그램에서 한 사람도 자살 환자가 발생하기 않았다.

그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알프레스 에들러(Alfred Adler)와 함께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스스로 독립된 심리치료를 개발해 나갔다. 그가 독일의 나치의 점령하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유태인 집단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부인은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여동생은 집단 수용소를 탈출해서 호주로 이민을 갔다. 그는 3군데의 집단 수용소로 전전하다가 폴란드의 이슈비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이후에 비엔나 의과대학 정신과와 신경과 방문 교수가 되었다.

그의 나치의 집단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로고치료법(Logo-therapy) 의 소개를 출판을 했다. 로고(Logo)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의미를 찾는다라는 말로써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아라 라는 말에서 자아의 발견으로 치료 기법을 고양화 시켰다. 여기에서 그는 실존주의 심리치료 그리고 인본주의심리학의 지지자가 되었다. 1947년에 비엔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교와 심리학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 무의식의 신(God)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그는 1961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그리고 1966년에 택사스에서 남부감리교 대학 그리고 1972년 피치버그에서 두케네 영혼 캐톨릭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85년에 미국 정신의학 학회에서 그에게 정신의학과 종교에 대한 공헌으로 오스카 피스트(Oska Pfister) 상을 수여했다. 1991년에 미국 국회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10개의 서적 중에서 하나로 의미를 찾는 인간(1946):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심리학자 가 선정 되었다(2021, 6,13: 위키피아).

그는 고전적 심리치료들은 연역의 기법을 사용해서 인간의 영혼을 고갈시킨다고 주장하고 인간성 회복에 치료를 초점을 맞추고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인 칼 로져스, 아브라함 마슬로우, 롤로 메이 등과 함께 인본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이슈비치 수용소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하루하루 보람을 찾음에 의해서 생존을 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 술회를 했다. 2 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무사히 살아남아서 이후에 신경과의사, 정신과의사, 실존주의 철학자, 인본주의 심리학자로써 그가 정신과의사로써 개발한 심리치료 기법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에서 나온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그의 저서인 로고치료법에서 밝히고 있다.

ego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청소년기의 위기를 주체성 위기로 표현을 했다. ego가 성숙해져서 성인으로 자아의 자아 주체성의 형성이 바로 자아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인생이라는 배의 항해의 키를 자신이 잡는 것이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에릭슨은 출생 직후의 유아들의 엄마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서 점차적으로 서서히 ego의 자치심의 개발과 독립심의 개발의 과정을 거치면서(예를 들어서 1-3세를 주도권 대(vs) 수치심, 의심으로 3-5세를 자치심 대(vs) 열등감으로) 상대적 의존의 시기부모가 보조 ego 기간에서 사춘기 기간을 통과함으로써 삶은 부모에게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가 스스로 자신의 자아의 독립심을 이루게 되는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인 독립으로 성인이 되는 것으로 정의를 했다. 그는 1968년에 쓴 젊음의 주체성 위기라는 저서에서 주체성의 유예(moratorium)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춘기인 틴 에이저(Teen 글자가 붙은 나이인(thirteenth( 13)-nineteen( 19)까지) 기간을 주체성 형성 대(vs) 주체성 혼란으로 정의를 했다. 그런데 사춘기 기간(청소년 기간) 6년 동안에 주체성이 형성되어 확고한 자아의 감각이 뿌리를 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대부분이 이 기간을 혼란의 기간, 고민, 갈등의 기간으로 확고한 방향 감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혼란하고 방황하는 기간을 주체성 유예라고 정의를 했다(에릭슨의 주체성 위기(1968)를 보라).

그는 주체성의 형성 기간에 혼란함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자아와 싸운 대표적인 심리학자프로이트월리엄 제임즈(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 그리고 섹스피어 이후에 세계적인 희곡작가로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대 문호죠지 버나드 쑈(George Bernard Shaw)를 들고 있다.

첫 번째 프로이트는 이미 수없이 논의한 것처럼 비엔나 의과대학 신경과 의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경과 의사로 개업을 했지만 사실은 신경과 환자를 한 사람도 치료하지 않았다. 그가 이미 그의 스승으로, 후원자로 그리고 친구로 그를 새로운 학문인 최면학을 소개해준 동업자(공동 저술)인 브로이어(Breuer)(프로이트보다 14살 연상)로부터 안나 오(Anna O)양을 소개받고 브로이어가 그녀를 2년간 치료를 하고 있다는 말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21세의 유태인 백만 장자의 외동 딸로 5개의 이상한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번씩 독일어인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영어로 사용(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히브류어), 오렌지 주스를 마실 수 없음(구토로 토해냄), 한 번씩 오른 손이 5개의 뱀의 머리로 보인다, 오른 손을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다 등의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종합신체검사에서 신체적인 이상이 없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신체적인 이상이 없는 안나 오라는 환자를 그 시점에서 히스테리아(hysteria)(정신병 환자의 총칭) 환자로 지칭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나 오가 프로이트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가 레지던트 4학년 말에 비엔나 의대에서 3명의 우수한 인재를 6개월간 해외 유학을 보내주는 제 1 회 행사에서 합격해서 1884, 10에 파리의 가르코트(히스테리아 치료의 세계적인 최면학의 대가)의 살페트리에 병원에 유학을 가게 된다. 그가 최면학을 배워서 귀국해서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 하다가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최면과 유사한 카우치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자유연상을 하는 치료 기법으로 치료를 한 4명의 환자(2명은 최면, 2명은 카우치에 누워서 최면과 유사한 기법) 그리고 브로이어가 2년 동안 최면으로 치료를 한 안나 오 양을 두 사람이 공동 저자로 1895년에 출판을 한 히스테리아의 연구가 정신분석의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수없이 이야기를 했다.

이후에 프로이트 자신은 히스테리아 치료로부터 확대해서 심각하게 불안한 사람(불안증), 신경쇠약증, 강박증에 대한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프로이트는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어떤 장애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제자들이 프로이트가 기차 공포증을 가졌을 것이라고 유추를 했다(어네스트 존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전기)를 보라).

그런데 프로이트는 신경과의사를 포기하고 스스로 최면치료 그리고 심리 치료사의 길로 걷기까지의 약 10년 동안 자신의 공포증을 꿈과 자아분석을 통해서 해결하면서 삶의 방향과 전공에 대한 수많은 자아와 싸움을 스스로 자아 분석으로 해결하고 심리학자가 된 것이다. 에릭슨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약 10년 동안의 혼란과 고통의 기간을 주체성 유예라고 밝히면서 주체성 유예의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써 마침내 확고한 심리학자가 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치료자가 명예로운 미침에서 소개한 프로이트에 대한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그는 3살 때 그가 태어난 모라비아(지금의 체코로 그 당시에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비엔나(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이사를 할 때 그가 비행기에서 불을 내 뿜는(제트 비행기)을 보고지옥에서 불타는 영혼이라고 불렀다(프로이트는 유태인으로 어린시절에 철저한 종교 교육) 그것 때문에 기차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그 당시에 여객기가 등장하기 이전). 기차의 화통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전이가 된 것 때문에 기차 공포증이 있었다. 이후에 그는 의과대학 졸업 후에 신경증 연구를 하면서 그의 꿈을 통한 자아-분석을 통해서 기차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Ernest Jones 1953년 프로이트의 업적과 생애 p. 143). 그는 수십 년 동안 기차 공포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가 그 공포증을 해결한 이후에도 기차여행에서 가벼운 불안으로 남았다 (Ernest Jones, 1953, 1955, 1957: 주㈜: 참고).

두 번째 주체성 유예의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인 월리엄 제임즈이다. 그는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출신 이었다. 그는 의사가 적성에 맞지 않다고 포기를 했다. 그는 약 10년 동안 스스로 혼란 속에서 정신증에 도달 직전에 자살 유혹에 시달렸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에릭슨의 주체성 유예를 보라). 그는 자아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그의 마음 속의 혼란을 스스로 왜 그가 혼란하고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죽음의 직전까지 도달했는가? 스스로 자아 분석을 그리고 꿈의 분석을 그리고 제임즈가 가르코트 학교에서 최면학을 공부해서 자아 최면을 통해서 내면의 심리적인 흐름을 연구하면서 그가 마음의 정지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라는 의식의 흐름을 기술하게 된다. 이것에 바탕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학의 연구자가 되었다. 그가 1890년에 드디어 10년 동안 내면의 자아와 싸움을 하면서 쓴 책이 심리학의 원리가 되었다. 에릭슨의 주체성 위기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주체성 유예에 대한 글을 치료자(필자)가 명예로운 미침의 블로그 글에서 소개한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또 한 사람은 정신분석가가 아니면서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된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암 제임즈(William James)가 두 번째 주인공이다. 그는 에릭슨(1968. 주㈜: 참고)이 쓴 주체성의 위기라는 저서에서 그의 청년기에 방황했던 내용을 주체성 유예라는 이름으로 장기간 주체성의 형성 이전에 혼란한 기간으로 이름을 붙이면서 소상하게 소개를 했다.

제임즈는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를 포기 했다. 삶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방황을 했다고 스스로 노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멜랑꼴리아의 심각한 정신증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는 10년 동안 전 세계로 방황하면서 생활을 했다. 그가 아마존 폭포에서 그리고 유럽으로 영국으로 독일로 10년 동안 떠돌이로 돌아다니면서 수 많은 명사들, 프로이트와 융과 그리고 영국의 휴글 젝슨(자아를 최초로 신조어를 만든 신경학자)등과 만나고 그들로부터 조언과 친교를 가졌다.

그는 자신의 꿈을 스스로 꿈을 분석하고 노트한 기록들을 에릭슨에 의해서 밝혀지면서 10년 동안 불안과 우울증으로 시달리다가 마침내 자신의 방향을 잡고 주체성을 형성해서(에릭슨의 주체성 유예의 대표적인 사람) 그가 경험한 심리적인 내용들의 연구에 몰두해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이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최초로 심리학을 강의를 하는 심리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가 연구한 심리학이 1890년에 심리학의 원리로 출판되면서 유럽의 지식인들을 놀라게 해서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세 번째 인사가 바로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 풍자가, 비평가인 죠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이다. 에릭스는 특별히 죠지 버나드 쇼라는 인물의 주체성 유예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전의 2사람과 달리 45년 동안 주체성 유예 기간으로 시달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드라마 작가로써 60편 이상의 작품을 인정받아서 영국의 최대의 현대 문인으로 등장한 시점이 70대 이후로 특별히 84세 때 영국에서 이름난 드라마작가로 자리를 잡았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45년 동안 자아와 씨름하고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된 점에서 쇼(Show)를 주체성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된 긴 기간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엑릭슨이 강조한 것은 그가 어린시절부터 글을 쓰는 것에서 하루도 빠짐이 없이 5페이지의 글쓰기를 계속했다. 만약에 그날에 글쓰기를 빠뜨리면 반드시 2배로 그 날의 글들을 채워 넣었다. 그가 오랜 기간 동안에 주체성 유예의 어려운 고통스런 기간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주체성의 뿌리 즉 글쓰기 때문이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그는 한 때 자살 시도를 하려고 했지만 글쓰기 때문에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치료자(필자)는 미국 유학으로 치료 심리학을 공부하러 떠나기 이전에 영문학을 전공을 했다. 특별히 한국 영어영문학회에서 발간한 10권의 전집(영국문학사, 미국문학사, 영어학 개론, 영시 개론, 영미 소설론, 영미 수필 희곡 평론, 영미 작가론, 영미 작품론, 영문법 개론, 미국영어 개론(1959, 신구문화사 출판), 영어학습지도, 영어 음성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조지 버나드 쇼에 대해서 머리 속에 각인된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에릭슨이 주체성 유예에서 쇼를 소개를 할 때 영어 작가론과 영어 작품론에서 읽었던 기억 때문에 다시 보관하고 있는 영어영문학 전집을 꺼내볼 수 있었다. 아래의 글은 영미 작가론에서 쇼에 대한 논평(노재민 교수의 글) 그리고 영국 문학사의 쇼에 대한 논평(여석기 교수의 글) 그리고 에릭슨의 쇼에 대한 글위키피아에서 쇼에 대한 글들을 종합해서 정리한 것이다.

 죠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서 청교도 백작이 후손인 아버지와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명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귀족처럼 살았지만 일을 하지 않았다. 무직으로 무위도식을 했다. 여기에 알코올에 빠져서 늘 술로 무골호인으로 보냈다. 이것이 어머니를 자극해서 부부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상당한 유산을 물러 받았다는 것을 알고 혹시 어머니가 그 유산을 삶에 보탤 것으로 기대를 했으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무능한 지식인으로 멸시 조롱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술로 세월을 보냈지만 다행히도 쇼에게 학대, 처벌 혹은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자녀 양육에 관심이 없었고 문학적인 흥미 때문에 단골 손님으로 더블린에서 상당히 이름이 난 L씨를 통해서 개인 교수를 받으면서 음악과 문학을 배우면서 그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라고 어머니를 혹평을 했다.

유일하게 쇼가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기억은 빵에다 버터를 발라 준 기억이 유일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의 초대로 늘 자신의 집에 늘 등장하는 L 씨에 대해서 혹시 그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가졌다고 노트하고 있다. 자신이 아버지의 친 자식이 아니고 L씨의 자식이 아닌가? 라고 의심을 할 만큼 오디프스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쇼는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그는 4 개의 학교에서 전통적인 교육에 실망을 그리고 학교에서 강압적인 공부를 싫어했. 고로 학교를 자퇴를 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격식에 매달리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어했다. 아버지와 L씨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둘 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노래를 부르면서 낙천적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의 덕분에 음악을 좋아했다. 그의 집에 드나들고 있는 문인들과 음악가들 때문에 집에서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 그는 트롬본, 풍금, 비올라, 첼로, 하프 그리고 탬버린을 연주를 했다. 그가 스스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그의 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이러한 어린시절의 경험이 나중에 음악 평론가로써 가명으로 글을 쓰게 되면서 인기를 얻게 된다.

그가 사춘기로 성장해 가면서 그는 토지 회사에 서기로 4년 동안 제법 성공적으로 일을 했으나 상사들의 잔소리와 간섭을 싫어해서 그만 두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L 씨가 런던으로 떠나자 어머니는 두 명의 여동생을 데리고 L 씨를 따라서 런던으로 가버렸. 쇼와 아버지는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쇼는 이후에 그의 자서전에서 아버지와 둘이서 살던 그 시점이 가장 행복했다고 노트하고 있다. 2년이 지난 이후에 어머니가 유산으로 런던에서 한 채의 집을 사서 1층에는 쇼의 가족이 이층에는 L씨가 일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으니 런던으로 오라고 해서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와 합류를 거부했지만 여동생이 폐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더불린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갔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노트하고 있다.

그가 런던에서 생활 하면서 도서관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들을 읽게 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때 그가 읽은 서적 중에서 마르스크의 자본론에서 매혹되어 이후에 사회 개혁주의자가 된다. 그의 평론가는 쇼가 그 때 도서관에서 읽은 다양한 책들 때문에 대학 졸업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논평을 했다.

에릭슨이 밝힌 것처럼 그는 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작품들을 썼지만 출판사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그 그들을 모아서 쌓아두었다. 그러나 글쓰기를 하루에 최하 4페이지 이상을 쓰고 빠지는 날에는 2배의 글쓰기를 했다. 이것이 그의 주체성의 뿌리가 된 것이었다. 이 때 쓴 작품들이 이후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출판되어지면서 드라마 작품으로 호평을 받게 된다.

쇼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무위도식으로 그리고 청교도들의 종교적인 집착들 인간들의 거짓과 가식과 허례 허식과 위선을 두 눈으로 보고 듣고 실감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위선과 거짓을 고발하고 고정관념적인 습관과 풍습을 깨부수는 것이 그의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빈털터리 허풍선이 신사로 불렀다. 각종 사회적인 비리들과 모순들과 허위들을 실감하면서 그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싹을 틔우게 된다.

그는 그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사회 개혁운동에 선두자가 되기를 소망을 했다 그것이 바로 파비안 사회주의(Fabian society) 연맹이었다. 파비안 사회주의는 급진적인 것을 배격하고 점진적 사회 계획 운동이었다. 파비안이라는 용어는 로마의 명장 파비안 막시무스(Fabian Maximus)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그가 카르타고의 전쟁 영웅인 한니발 장군과 대적한 인물이다. 카르타고(262 BC)가 지중해의 상권을 놓고 로마와 충동하면서 한니발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산을 넘어서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게 되었다. 한니발에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파비안 장군은 게릴라 전으로 한니발 장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작전을 하게 된다. 먼 길로 대군을 이끌고 로마에 온 카르타고 군대의 중간 보급로를 차단하고 그리고 로마군이 철수하면서 인근 주변을 초토화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식량 문제로 철군하게 만들어 결국 이번에는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직접 본토를 침공해서 함락시킴으로써 한니발 장군을 패전장군으로 만든 장본인이 파비안이다. 그의 전술을 본떠서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아니고 점진적 사회계획으로 창설된 사회주의 연맹이었다. 이 연맹이 영국의 노동당의 전신이 된다. 그리고 경제학과 정치학의 런던 대학으로 창설되어 1900년에 런던 대학과 통합하게 된다(2021, 6, 26: 위키피아).

파비안의 게릴라 전술은 치료자(필자)가 몇 년 전에 본 중국의 드라마인 미완의 책사 사마의(42부작 2017, 6, 22-7, 14), 최후의 승자 사마의(44부작, 2017, 12, 7-2018, 1, 11)(다음 백과)가 삼국지의 후반기에 조조와 유비가 사망하고 촉 나라에 유선이 즉위, 위나라에서는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를 하면서 촉 나라의 제갈량(제갈공명) 6차례의 북벌에서 위 나라의 사마의의 게릴라 전과 보급로 차단으로 결국은 사마의의 승리를 가져다 준 드라마에서 치료자(필자가) 제갈량과 사마의를 동양의 정신분석가로써 블로그 글에서 밝힌 바가 있다(호소용음: 사마의 3, 호소용음: 사마이 2, 미완의 책사 사마의 1의 글을 보라).

다시 쇼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그가 70대의 나이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특이한 유머로써 사람들을 어떻게 웃게 만드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정한 패턴에서 갑자기 유턴을 하면 웃기 된다는 것을 알고 어린시절의 최하의 사회계층 생활로부터 혼 사회적인 모순을 까발리면서 이것을 유머로 대체 시켰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등장하게 된다. 청중들은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실컷 웃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들을 비난하고 조롱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쓸쓸하게 또 한번 웃게 된다(노재민 교수, 1959년 쇼에 대한 논평).

동료들과 비평가들은 쇼의 이러한 유머가 없었다면 그는 단두대(처형)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논평을 했다. 정신분석가로서 급진적인 사회 개혁 운동을 하다가 뉴욕에서 멕카시 열풍에 감옥에서 사망하고 그리고 정신분석학회로부터 쫓겨난 천재 정신분석가인 윌헬름 레이크(Wilhelm Reick)를 보라(정신분석학회는 정치 운동을 하는 정신분석가들을 제명시켰다).

쇼의 작품들은 그가 젊은 시절에 글을 써서 모아둔 작품들이었다. 그의 글들은 주로 사회적 모순을 그렸다. 치료자(필자)는 그가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책을 읽었던 것 중에서 틀림없이 프랑스의 작가인 알퐁스 도오테(Alphonse Daudet)의 작품들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도오테의 풍차간 소식의 작품이 쇼의 작품과 유사성 때문이다. 도오테는 풍차간 소식에서 꼬르니유 노인이 풍차 방앗간(바람의 힘으로 밀을 빻아주는 방앗간. 물의 힘으로 벼와 보리를 빻아주는 우리나라의 물레 방앗간과 유사)을 운명하면서 동네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아왔다 그러나 신식 문명으로 발동기(원동기)가 들어와서 신속하게 밀을 빻아서 밀가루로 빵을 만들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원동기를 나쁜 기계로 일축하고 자존심을 꾸기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내면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밀을 가지고 원동기 방앗간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태연하게 꼬르니유 노인은 매일 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밀을 모아서 자루에 짊어지고 늘 하는 대로 풍차 방앗간에 와서 밀을 빻아서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을 보게 된다. 꼬르니유 노인의 딸이 시집을 간 이후에 꼬르니유 영감이 보이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풍차 방앗간에 들어가보니 꼬르니유 영감이 굶어 죽어 있었다. 영감님이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동네 사람들의 밀을 자루에 넣어서 짊어지고 다닌 그 자루 속에는 석회가루가 들어 있었다. 꼬르니유 영감님은 체면상 그의 풍차 방앗간이 원동기 방앗간에 밀려서 고객들을 잃어버리고 사업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참고 이를 악물고 버티어온 것이 드러난 것이다.

영감님은 딸을 시집 보내기 위해서 사돈어른에게 풍차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허세로써 체면을 살린 것이었다. 현대 문명에 밀려나서 몰락해 가는 한 가문을 그리면서 개혁에 떠밀려서 변신하지 못하고 구태로 남아있다가 망해가는 모습은 쇼가 풍자한 청교도들, 위선과 가식을 버리지 못하고 체면상으로 귀속의 풍모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도덕주의자를 비꼬는 것과 흡사하게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의 양반들이 굶어 죽어도 양반의 행세를 하면서 배속에서 꼬르르소리가 나는 것을 감추고 위장하기 위해서 으흠 으흠 하면서 체면을 살리는 모습과 닮아 있다. 죽어도 체면을 구기는 것은 양반들의 도리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를 시로써 노래한 시조가 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한가?”라는 시조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물을 마시고 베를 채우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 소일하면서 체면을 세우고 있는 조선 시대의 양반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치료의 사례에서도 유사한 예들을 많이 본다. A씨는 50대 초반으로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6개월 동안 받게 되었다. 그의 어린시절은 파란만장 했다. 아버지는 40대 초반으로 첫 부인의 사망으로 재혼을 하면서 20대 초반의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전처의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자신의 4명의 자식보다 전처의 자식들을 챙겨주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A씨는 아버지가 무능력해서 일을 하지 않고 늘 술에 취해서 대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졸고 있는 아버지를 경멸을 했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고 했다. 자신을 낳아준 것 이외에는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분노했다

A씨의 어머니는 생계 때문에 자녀 4명의 챙겨주지 못했다. 단물(감주) 장사를 했다. 머리에 단물 잔지를 이고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더욱 더 전처 자식이 초등학교 졸업 후에 사업을 한다고 했다가 실패로 집을 날려버렸다. 졸지로 가족들이 산꼭대기에 단칸 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전처 자식들은 가출해서 사라졌다.

장남인 A씨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사환(심부름 하는 아이)으로 일을 했다.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일을 잘 해서 칭찬을 받았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1년에 몇 번 나가지 않았지만 졸업장을 받았다. 사환으로 앞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학교 시절에는 낯에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허가 없이 개설된 무허가 야간 중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다행히도 그는 고등학교에는 야간 상업 고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교 졸업 시에 지방 은행원 채용시험에 합격해서 은행원이 된 것이었다. 명문 상고들의 졸업생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그는 출퇴근이 없이 죽자고 일을 했다.

그 시점에서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붕괴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을 눈앞에 보면서 과로로 붕괴되어 환자가 되었다. 일을 할 수 없이 집에서 두문불출하게 된다. 어머니는 7년 동안 우울증과 싸우다가 사망을 했다 이후에 A씨는 승승장구해서 지방의 은행장으로 주말 부부가 되면서 외도 문제로 부인이 자살 시도를 하게 되었고 약물 치료에 효과가 없게 되면서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치료자에게 부인의 치료를 의뢰를 했다 그리고 부인이 우울증에서 회복 하면서 A씨도 6개월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유사한 이야기는 영국의 작가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의 작품인 더버빌가의 테스에서도 유사하다. 테스의 아버지는 명문 귀족의 후손으로 직업이 없이 일을 하지 않고 술로써 세월을 보낸다.백수로 무직에다 알코올 중독으로 세월을 보내면서도 명문 귀족 타령만 하고 있다. 테스가 장녀로 태어나서 똑똑하고 동료들보다 가장 먼저 앞서서 발전을 해나갔지만 가족들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등에 떠밀리어서 더버빌가의 이름을 매수를 해서 귀족 행세를 하는 부유한 집에 양녀로 들어가게 된. 이름이 양녀이지 사실은 가정부(과거의 식모살이)였다 집에서 청소와 잡일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받아서 가족들에게 부양을 해 오다가 그 집의 먼 친척의 난봉꾼에 의해서 강간을 당하고 임신하게 되어 처녀가 애를 낳게 된 것이다. 주변의 비난과 멸시, 모욕을 참고 견디다가 아기는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 사망하게 되고 테스는 매춘부로 전락하게 된다(상세한 것은 영혼의 죽음 블로그 글을 읽어보세요).

부모가 무능력하게 되면 특별히 아버지가 무능해서 자녀들을 돌보지 못하고 가장으로써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어머니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게 되고 자녀들을 돌보기 어렵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들이 경제적인 짊을 지게 되는 것이 바로 소년소녀 가장들이다. 그들은 부모의 짊을 대신에서 스스로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게 된다. 그들이 열심히 해서 성공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에는 즐거움이 없다. 일벌레가 되기 쉽다. 심리치료를 39년 동안 해 오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다시 죠지 버나드 쇼의 이야기로 되돌가 보자. 그의 작품인 구세군 소령 바바라에서 주인공의 딸이 구세군 운동을 하면서 그들의 습관화 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구세군 딸의 비판하고 있다.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은 조그만 하자에도 즉시 반품으로 고쳐지고 새로운 제품들이 만들어지는데 너희들 구제군에서는 한결같이 변화할 줄 모르고 구태의연한 태도를 되풀이 하고 답습한다고 비판을 한다. 인간과 초인간의 작품에서는 원시인간으로부터 문명화 된 사회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원초적인 힘(리비도의 섹스 힘)이 삶의 근원으로 계속해서 사회가 개선되어지면서 초인적으로 진화해 나가는 것을 그리고 있다. 사랑을 하는 스타일들이 남자들이 여성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유혹을 하는 스타일(중세의 기사도 정신을 로맨틱하게 그린 코트리 러브(Courtly Love)을 거꾸로 여성들이 남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원하는 남성을 유혹하는 작품에서 쇼가 자신의 삶을 자서전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연상의 여성이 그에게 매혹되어 그를 따라다니면서 구애를 하는 작품을 통해서 그의 부인이 구애한 것을 작품으로 그렸다. 실제로 그녀가 그에게 구애를 했고 쇼가 폐염으로 죽음의 직전에서 미국에서 날아온 부인의 지극정성으로 살아남게 된다. 이후에 8년 동안 연애 기간을 거치면서 결혼을 했고 그들은 백연회로를 했다. 부인은 45세로 사망했다. 쇼는 94세로 사망했고 영국의 대가들이 묻히는 묘지를 거부하고 부인과 함께 합장이 되었다.

그는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60편 이상의 작품들을 집필을 했다. 그는 섹스피어 이후에 영국 문단에서 최고의 드라마 작가로 인정 받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서 그의 작품들이 뉴욕의 브로드웨이 공연무대에서 연극공연뿐만 아니라 영화로 만들어졌다.

에릭슨은 쇼가 초반기 삶에서 작품들의 출판을 거부당하고 무명으로 삶의 어려움들을 견디고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아의 주체성이 유예로 유지되면서 꿈틀거리면서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것의 결실로 글을 쓰는 것에서 즐거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에릭슨의 주체성 확립, 주체성 유예는 용어들은 사실은 화가인 폴 고갱이 자살 시도를 하면서 그가 스스로 찾는 자아에서 나온 것으로 첨가하고자 한다. 에릭슨은 사춘기 즉 청소년들이 내가 누구인가? 라는 자아 탐색은 즉 Who am I? 라는 말은 화가인 폴 고갱에서 비롯된 것으로 미술 역사가들이 기술하고 있다.

 폴 고갱은 살아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주식 회사에서 증권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가정 붕괴되었다. 그의 그림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11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부인은 5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인 덴막으로 떠났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의 영토인 타히티로 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실망으로 자살시도를 하다가 살아남았다. 그는 그 때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인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대한 자아의 문제에 탐닉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라는 말의 what are we?는 에릭슨에 의해서 Who am I? 로서 나를 찾아서 내 자아를 찾기 위한 청소년들 몸부림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타고한 재능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라고 확신을 하고 자아가 뿌리가 내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후에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때 그린 그림이 빨간 꽃과 유방이었다. 사후에 빈세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와 함께 후기 인상파의 대표자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자아를 찾는다 라는 자아 찾기가 심리치료에서 어떻게 응용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B씨는 29세의 젊은이로써 4년 동안 사귀던 여자 친구가 결별을 선언하고 떠난 후에 자신이 문제가 있다 라는 것을 깨닫고 정신건강전문가인 정신과의사 선생님에게 4개월 동안 50분씩 1회기로 4개월 동안 치료를 받다가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심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컨설팅 2시간을 받은 후에 치료자 선생님과 호흡이 맞고 의사소통이 잘 된다고 인식이 들어서 6개월 치료 계약을 하고 1주일에 2회씩 1회기당 2시간으로 1주일에 4시간씩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지금까지 제대로 직장에 다니지 못하고 늘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킨 것을 회상을 했다. 치료자가 아버지에 대한 좋아함, 존경심을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아버지에 대한 좋아함, 존경심은 0%라고 했다. 미움이 100%라고 했다. 아버지는 무능력했다. 중학교 중퇴로써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구타하고 처벌을 했다. 할아버지는 군장교로써 군대식으로 아들을 길들이려고 한 것으로 대신에 아들인 아버지는 그러한 부당함에 반항아가 된 것으로 드러났다. 어머니는 여고를 졸업한 사람으로 중매와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데 어머니 역시 말이 없고 심각한 불안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대화가 거의 없고 눈치, 코치로 비위를 맞추는데 천재적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대화가 거의 없고 늘 서로 긴장된 분위기가 B씨의 어린시절에 눈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 있음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가출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50대 후반에 치매 판정을 받아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특별히 B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왜 자신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호소를 했다. 어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을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양육을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으로 드러났. 어머니는 B씨가 어린시절에 학습지, 학원과외 등으로 다른 어린이들이 하는 것을 모두 지원해주었다. B씨가 1년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 한 후에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한 달에 용돈으로 50만원을 지원해주었다.

 B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어린시절의 기억은 지하방에서 생활 하다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식당을 운영하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옥탑방으로 옮기면서 동료들에게 부끄러워서 옥탑방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지 않고 동료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학습 부진아로 방과 후에 남아서 따로 공부를 한 기억을 회상을 했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죽자고 공부를 해서 반에서 5등 이내로 들어가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을 했으나 왜 자신이 공부를 해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우리나라의 최고의 대기업에 응시해서 1, 2차 시험에 합격을 했으나 3차 시험의 실기에서 불안해서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 실패하고 지금은 외주의 도움으로 집에서 일을 받아와서 그것을 완성해서 제출해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입원해있기 때문에 앞으로 병원 입원 비용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했다.

 B씨는 지금도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의문이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주의관심을 방해한다고 했다. 왜 내가 이것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그의 핵심이었다.

 치료자는 그의 어린시절의 분석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실망하면서 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아들 B씨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다. B씨는 유치원 시절부터 몇 개의 학습지를 해야 했다. 하기 싫어서 미루게 되면 어머니가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하루 만에 빨리 해치우기도 했다. 방과후에 학원에 다녀야 했다. 영어, 수학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등등 다른 어린이들이 하는 것에는 어머니가 전격적으로 지원을 해 주었다. 어머니는하나뿐인 아들 B군에 대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또한 토요일, 일요일에 어머니가 쉬는 날에는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박물관, 도서관, 전시관 등으로 데리고 다녔다. 아들에게 많은 견문과 지식을 쌓도록 배려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B씨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도 한번도 즐거운 적이 없었다고 토로 했다. 그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도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토로 했다. 치료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눠느냐? 라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원래 말이 없었고 B씨는 그냥 따라다녔다고 했다.

 B씨의 치료가 약 20 시간을 지나가면서 B씨가 하는 일에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지금까지 B씨의 의문은 분석으로 밝혀졌다. 어머니와 B씨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눈치가 100단으로 아들에게 싫어하는 소리를 하거나 야단을 치거나 처벌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B씨 역시 어머니의 대화패턴으로 대인관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서관, 박물관 그리고 전시관들을 어머니가 B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서로 말이 없었다. 고로 B씨는 왜 그러한 것을 해야 하는가? 왜 학습지를 받아야 하는지? 왜 과외 학원에 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그냥 해야 한다고 하는 것에 의무적으로 반응행동을 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즉 B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혹은 고학년을 통과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즉 하고 싶지 않다 혹은 짜증, 분노, 노여움 등을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자신에게 투자하는 고마움 때문에 어머니에게 하기 싫다고 하면 어머니의 마음을 다칠 것이라고 노심초사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었다.

 B씨는 자아 즉 자신을 위해서 공부, 과외 그리고 여러 곳에 견학을 다니는 것이 자신의 자아를 위해서 다닌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가자고 해서 하기 싫은 것을 강압적으로 하게 되면서 왜 내가 이것을 해야 하는가? 라는 내면의 질문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고 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고 어머니가 시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억지로 한 것이다 라는 것을 분석으로 밝혀냈을 때 B씨는 무릎을 쳤다.

이제서야 자신이 왜 공부, 학습, 배움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즐거워서 한 것이 없고 항상 전쟁을 치르듯이 죽기살기로 그리고 이를 악물고 수행한 것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B씨의 마음 속에 억압된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리고 말이 없는 늘 불안했던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한 나를 위한 진실된 삶을 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환자인 C군은 이미 여러 차례 소개를 한 치료자에게 13년 동안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은 만화가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주체성의 뿌리만 다루기로 한다.

그의 부모님은 둘 다 공무원으로 맞벌이를 했다. C군은 할머니의 손에서 성장을 했다. C군은 장남으로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13년의 분석 과정을 통해서 C군은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불안을 오히려 거꾸로 C군이 흡수를 하고 있었다. 유치원 시절에 우유와 빵을 지급하면서 그것을 유치원에서 다 먹지 못하고 가져온 것에 대한 비난과 처벌이 따라왔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출석보다 결석이 많았다. 늘 감기 몸살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는 C군을 종합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종합 검사를 해 보았으나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다는 결과만 받았다. 할 수 없이 기독교 혹은 캐토릭 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아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무당과 점술가로부터 부적 혹은 굿을 하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학교에서 동료들과 관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불안이 거울 반사가 되어 C군의 마음에 투사 동일시로 과도하게 불안했기 때문에 면역 기능이 저하로 감기와 몸살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어머니는 3명의 딸들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유독 C군에게 간섭하고 강압하고 처벌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C군이 호적을 떼어보았을 때 계모가 아니고 친모임을 알게 되었다.

  3학년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10시경에 집에 들어오면 잠을 자고 있는 엄마를 살해하고 싶은 분노 때문에 어떻게 엄마를 죽일 것인가? 수건으로 혹은 칼로 혹은 망치로 내려치고 싶다는 생각에 6개월 동안 시달리다가 고 3학년이 끝났기 때문에 다행히도 실천에 옮기기 않았다.

 C군이 고 3학년 때 장애인 특별 대우로 똑 같은 수능시험을 통과한 것이 아니고 장애인들을 따로 시험을 보고 특별 입학이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고 나서 장애인 심사를 하는 장소에서 몇 백 미터 늘어선 줄을 기다리면서 어머니는 아들 C군을 장애인 판정을 받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고 회고를 했다. C군은 자신이 장애인이 아니다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리고 심사관이 C군은 장애인이 아니고 건강한 학생이라고 말을 해도 어머니는 C군을 심신미약자로 장애인이다 라고 심사관에게 떼를 썼다.

결국 장애인 판정을 받아서 C군은 서울에 있는 상당히 이름이 있는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기뻐했다. 동네방네로 다니면서 아들이 xx 대학경영학과에 입학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러나 C군은 동료들이 혹시 정상적인 시험이 아닌 특혜로 들어왔다 라는 것을 알게 될까 봐서 동료들과 관계를 피했다. 어머니로부터 늘 너는 돈 먹는 기계이다, 너 한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느냐?”(C군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키가 커는 호르몬 주사를 맞게 되었다(그 주사는 보험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돈이 비쌌다). 학교에서 동료들이 괴롭힌다고 호소하면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너는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말라 혹은 돈을 주면서 그들을 회유를 하라고 했다. 돈을 가지고 C군을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과자와 학용품을 사주면서 회유를 했지만 초반기에는 잘 통했지만 나중에 계속해서 과자 혹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이 괴롭히는 것을 알고 그만 두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키가 99cm였기 때문에 별명이 땅꼬마였다. 어머니는 늘 집에 틀어 박혀 있는 아들을 보면 밖에 나가서 동료들과 어울려 놀아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때 C군은 뒷동산에 올라가서 잔디밭에 누워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면서 혼자서 달나라 혹은 북극에 가서 혼자서 살고 싶다고 상상 속에 빠졌다. 다행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어머니가 과학전집, 위인전집 등의 책들을수십권씩 세트로 사주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었다.

 대학생이 된 C군은 학교 서클 모임인 만화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운동권 만화를 그리도록 강압해서 탈퇴하고 만화 학원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여름 방학에 그는 아침 9시에 만화 학원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저녁9시에 원장이 퇴원할 때 함께 퇴원을 했다. 원장선생님이 만화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3년 동안 대학에는 형식적으로 참가해서 졸업장을 받았지만 정작 경영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만화 학원에서 3년 동안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학원의 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번에는 2년 째 만화 전문가 시험에 합격해서 2년 동안 전문 만화가로써 4명의 교수로부터 철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졸업 전시회에는 부모님은 오지 않았다 다른 졸업생들은 가족들이 모두 나와서 축하 혹은 가족공동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C군은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만화를 그리면 밥 먹고 살수 없다.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한다 라고 다그쳤다. C군은 자신이 대인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한다고 해도 관계가 어렵다 라는 것을 알고 혼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화를 선택한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 부모님 특별히 어머니가 돈을 벌어야 한다 라고 해서 일자리를 구하라고 강압을 했다. 할 수 없이 만화 경력을 이력서로 만들어서 다행히도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업을 했다. 초반기 몇 개월은 장애인의 수당이 붙여서 한 달에 50만원씩 통장에 돈이 쌓였다. 그러나 8개월 후에 회사의 부도로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그 시점에서 어린이 동화를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으로 100개의 삽화 그림을 100만원을 받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것을 자랑 삼아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했다가 호되게 처벌을 받았다. 그것을 자랑이라고 하는가? 라고 빈잔을 받았다.

C군은 1달 안에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면 위약금으로 2배를 물러내야 한다는 계약서 때문에 쉬지 않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첫 째 여동생의 어린이들 2(3살과 1)을 돌보아주면서 어린이들을 C군에게 맞기도 외출을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거부를 하지 못하고 낮에는 어린 조카들을 돌보아주고 밤에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가 밤중에 잠을 자나가 일어나서 2층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올라와서 아들 C군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노발대발 했다. 어머니는 혼자서 전기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불을 끄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전기불 대신에 양초를 켜고 작업을 했다. C군의 노력은 1달 만에 100장의 동화 삽화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본격적으로 삽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부모님이 그림을 그리면 굶어 죽는다고 반대를 해서 부모님이 보지 않을 때 밤에 주도 작업을 했다. 부모님의 강압으로 공무원 시험 대신에 사회복지사 자격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서 과목별로 공부해서 통과를 할 시점에서 그가 취업한 애니메이션 회사의 부도로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자살을 결심하고 서점에서 우연히 치료자의 저서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이라는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C군은 자살을 하게 되면 죽고 나서 부모님이 C군의 통장에 남은 돈 350만원이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것을 두려워해서 그 돈을 쓰고 나서 죽겠다 라고 해서 치료사에게 전화로 연락이 되었고 6개월 동안 심리치료를 받게 된 것이었다.

치료자는 C군의 사례의 분석을 통해서 그가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었다. 집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치료 4개월 시점에서 부모님에게 원룸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고 고시원으로 나올 수 있었다 대신에 부모님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개선해서 자아의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치료를 해 나갔다.

 과거에 C군은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에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C군의 한마디가 어머니의 10마디의 잔소리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좋은 것이 좋다 라는 생각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다 치료자는 이것은 순간적으로 조용하고 갈등이 없지만 의사소통을 하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부모님과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이야기를 하고 자아 표현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말로써 감정을 표현하는 훈련을 해 나갔다.

 C군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는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토로하면서 자아의 주체성의 확립을 목표로 치료를 해 나갔다. 치료 8년 시점에서 C군의 건강은 극도로 좋아졌다. 그는 치료자의 도움으로 식사요법(영양의 고루 공급)과 운동요법으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공부에 집중 정도를 높이고 불안의 정도를 감소시키면서 2시간 분석 상담을 통해서 대화 훈련과 긴장방출의 노력으로 치료8년의 시점에서 C군의 주치의가 C군의 모든 건강 지표 즉 혈압, 콜레스테론, 섹스 호르몬, 심장박동 등이 정상으로 되돌아 온것에 대해서 깜짝 놀랬다. 몸무게가 8kg이 늘어났.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가 이제는 몸무게를 감량해야 하겠다고 농담을 했다. 치료 10년 째 부모님이 치료자를 방문을 해서 이제 죽을 때 C군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감사를 표현을 했다.

 여기에서 C군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강한 자아의 주체성이 뿌리가 내려지게 되었다. 고로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님의 만류와 강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가게 된 것이다. 자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아의 주체성 즉 삶에서 자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과 성공과 부()와 명예가 제 1 차가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제 1 차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림 그리기를 할 때 가장 행복했다고 털어 놓았다.

치료가 10년을 넘어가면서 치료자의 권유로 인터넷에서 홈페이지에 그림을 올리게 되면서 어린이 동화책을 출판하는 회사로부터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을 몇 번 받았지만 그는 마음 속에서 만약에 내 그림을 그것을 그림이라고 그렸는가? 라고 비판, 비난을 두려워해서 망설이는 문제를 분석으로 다루면서 C군의 그러한 머리 속에 각인된 목소리는 바로 부모님의 그림에 대한 처벌과 발대로부터 입력된 입사물 임을 밝혀내고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서 3년 동안 계속해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제 마무리를 하기로 한다.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치료자에게 항의와 분노를 표현을 한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아의 목소리를 내게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분리 독립으로 자치심, 그리고 친밀감한 대인관계를 강조하는데 정작 치료사 선생님은 자아 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치료실 안에서 전문서적들을 읽고 입술 서비스로 말만 하는 탁상공론자가 아닙니까? 라고 공격을 한다. 치료자는 그들이 말을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치료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치료자가 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알바를 하면서 주유소에서 주유일, 노인들의 돌보기, 휠체어 밀어주기 보조사, 청소, 야간에 편의점에서 일하기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2년 동안 하프 웨이 하우스(Half Way House)에서 정신병 환자들과 24시간 2년 동안 야간 근무를 도맡아서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경험을 했다 라는 말에 모두들 놀랬다.

 뿐만 아니라 치료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국 유학을 꿈꾸고 있었다 중, 고교 시절에는 영어는 항상 일등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영어 교사를 하면서 10개년 계획으로 미국 유학에서 전공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했다. 전과목들의 개론들을 영어 원서로 공부를 하면서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7년 시점에서 영어의 작가론과 작품론에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의 주인공이 정신이상 이라는 것을 알고 주인공의 심리분석보다 실제 정신이상을 치료하는 치료 심리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3개 대학에 입학 안내서를 주문을 해서 분석해 보았을 때 치료 심리학을 전공하려고 하면 심리학을 전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대학에 1학년으로 35세대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치료자가 치료 심리학 이라는 자아 주체성을 확실히 뿌리를 세웠기 때문에 미국에서 공부의 고통과 괴로움은 사실 고통이 즐거움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39년 동안 심리치료학을 공부하면서 후회를 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치료자는 하루에 최소 5시간 그리고 최대 10시간씩 공부를 한다. 미국에서 함께 가지고 온 전문서적의 복사판(전문서적을 직접 책을 사면 돈이 바싸기 때문에 출국 2년 혹은 3년 전부터 한 페이지에 1센터를 주고 책의 내용을 복사해서 1권의 책값으로 6권을 복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문서적에 대한 문제는 아마존이 등장하면서 인터넷으로 전문서적을 구입하게 되면서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치료자는 대학 이러한 삶의 비전과 자아 주체성의 방향 감각을 바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에서 대학 1학년 여름 방학에 대학 도서관에는 책이 빈약해서 스스로 부산시립 도서관에서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식사를 하면서 (그 때는 구내 식당이 없었다) 대학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적인 명작들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그 때는 대학입학 때 대학생이 읽어야 할 100가지 교양도서가 없었다). 여름 방학 때 모두 약 20여권 그리고 겨울방학 때 약 20여권으로 모두 40여권의 세계명작들을 읽어냈다. 매일 같이 독서 일기 형식으로 여름방학 때 읽은 것은 여름 밤의 꿈(섹스피어의 작품의 이름) 그리고 겨울 방학 때 읽은 것은 겨울이야기(섹스피어의 작품의 이름)로 이름을 붙였다.

치료자가 대학 1학년과 2학년 때 이미 40명의 세계적인 인물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 것?에 대한 윤곽을 잡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 유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치료자가 걸어온 길을 주체성 형성과 자아의 방향 감각과 내 삶은 부모님을 위한 삶이 아니고 내 자신을 위한 삶이다, 성공, 출세, (), 명예는 제 2 차적인 것이고 제 1 차적인 것은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삶을 컨트롤하고 내가 삶을 이끌고 나간다 라는 것을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공부하면서 자아에 대한 중요성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치료자의 이러한 말에 배부른 소리라고 일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씩 일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면 잠들기 십상인데 언제 나를 찾을 시간이 있는가? 라고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삶은 한번뿐이다. 그 삶이 나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키에르키에골, 니체, 프로이트, 월리엄 제임즈, 폴 고갱, 죠지 버나드 쇼 등이 자살의 위기 즉 삶에서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으로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을 찾게 되면서 위기에서 벗어나가 세계적인 명사가 될 수 있었다. 출세, 성공과 부와 명예는 그들에게 제 1 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찾는 자아 찾기가 제 1 차적이었고 그 결과 제 2 차적으로 명예와 부가 따라온 것이다. 치료자가 이것을 다시 강조하는 의미에서 한 개의 단편 삽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알퐁스 도오테의 스갱 할아버지의 염소의 단편이야기이다. 스갱 할아버지는 여러 마리의 염소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늑대들이 밤새 울타리를 넘어서 염소들을 잡아 갔다. 스갱 할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블랑캐트 염소를 지켜주기로 했다.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고 감시와 감독으로 철저히 보호를 해 주었다. 그런데 블랑캐트 염소는 행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잉보호 속에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산으로 도망을 치고 싶었다.

항상 스갱 할아버지는 블랑캐트에게 집 밖으로 나가면 언제든지 약탈당하고 죽을 수 있다 사기를 당하고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경고를 하고 할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안전 제일로 걱정근심이 없이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설득을 했다.

그러나 블랑케트 염소는 이것은 내 삶이 아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은 내 삶이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내가 원하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스갱 할아버지의 집의 울타리를 탈출하고 산으로 도망을쳤다 그러나 결국은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러나 블랑케트를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고 누구나 모든 생명체들은 언젠가를 죽게 되어있다 고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 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후회가 없는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치료자는 가족 치료를 10년 동안 공부를 하고 치료를 하면서 그리고 그 다음에 29년 동안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치료를 해 오면서 심리를 치료하는 사람들의 책들을 읽고 연구를 하면서 그들이 어떤 학파들로 어떤 분야를 연구하고 치료를 하든지 간에 그들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서로 다르지만 핵심은 자아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환자들의 자아의 성장의 장애물을 걷어내서 스스로 평생도록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심리치료의 핵심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신분석은 타고 나는 원초자아인(id)로부터 ego가 독립해서 분화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서 사춘기에는 독립된 사회적 생활을 하도록 ego가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한마디로 이것을 원초자아(Id)가 있는 곳에 ego가 있다 라고 표현을 했다.

대상관계 정신분석에서는 투사동일시 1살과 2살 때는 너와나의 하나됨으로 아기들의 마음이 엄마의 마음과 일치하지만 점점 발달 단계를 거치면서 자치심과 독립심을 배양하는 쪽으로 향한다는 것도 0-3세까지의 자아의 개발과 어머니로부터 분리에서 스스로 혼자서 자아의 자치심을 개발하는 쪽으로 향하게 한다.

 몰러(Mahler)의 분리-개인화 역시 엄마와 아기의 공생관계(symbiotic phase) 즉 너와나의 하나됨의 관계에서 엄마로부터 자아의 분리 그리고 개인화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도 역시 부모로부터 스스로 독립과 자치심을 배양하는 쪽으로 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가족 치료에서도 구분화(부모의 자아와 밀착으로 하나된 것으로부터 자아의 독립과 차치심의 배양)쪽으로 치료를 연결해 나가는 것이다. 가족 구조적 조직 치료 이론의 대가인 미누친Minuchin)은 관계에서 밀착된 찰떡 관계(engagement)를 떼어내는 구분화 관계(disengagement)의 치료과정으로 그와 반대로 너무 멀어져 감정적으로 이혼한 커플들을 다시 친밀한 관계로 이어 붙이는 관계를 사용 한다. 결혼과 커플 치료의 대가인 필라델피아의 탬플 대학의 가족치료사인 프라모(Faramo, 1982)는 역시 배우자 사이에서 구분화를 강조하고 있다. 일심동체의 자아가 연약한 배우자가 파트너에게 의존해서 눈치, 비위를 맞추는 것에서 자아의 힘을 길러서 스스로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자아의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치료를 하고 있다. 가족 치료사인 보웬(Bowen, 1985) 역시 구분화가 잘 되어 자아가 뿌리가 내린 부부들이 결혼 생활이 조화롭다 대신에 한쪽이 자아가 연약해서 다른 쪽의 의존하게 되면 될수록 갈등이 심각하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자신의 자아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는 사람들은 니체가 100년 전에 이야기를 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자아를 찾는 것이다. 자아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렵다 라고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자아에 대한 투자가 가장 값지고 귀중한 투자이다. 재물에 대한 투자는 재물을 잃고 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투자는 죽을 때까지 내 자산으로 남게 된다. 이것보다 더 큰 값진 투자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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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건드슨(Gunderson). 보드라인 성격 장애(1984), 보드라인 치료 안내서(2005), 보드라인 이해와 치료(2005)

 미아레(Mearles). 친밀감과 고립(2005), 놀이와 상징(2005),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해리 모델)2012),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치료 모델(2012)

 모델(Modell). 대상관계 정신분석(1985), 대상 사랑과 현실(1985), 사적인 자아(1996) ,다른시간 다른 현실: 정신분석 치료 이론(1996), 상상과 의미깊은 뇌(2006), 새로운 맥락 속에서 정신분석(1984)

 프라모(Framo, 1982). 결혼과 부부 치료의 탐색

 미누친(Minuchin, 1992). 정신병원 안에서 미침

 보웬(Bowen< 1995). 치료적인 실제 안에서 가족 치료

 볼라스(Bollas, 1987). 대상의 그림자

 코호트(Kohut, 1971). 자아의 분석

 메이(May). 불안의 의미(1996), 자아의 탐색(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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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log.naver.com/psychclinic/222411064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