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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 학자들은 19세기를 히스테리아(hysteria)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는 빅토리아 시대로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처럼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 되었고 성욕구는 엄격히 타부시 되고 금욕과 절제가 미덕으로 존중받던 시대이다. 프로이트가 이 금기에 도전을 했다. 그 원인은 히스테리아 때문이었다. 히스테리아 때문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설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와 히스테리아 관계를 알아야 정신분석의 탄생을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초반기에 미국의 유명한 시사주관지인 TIME지가 세계의 유명한 석학들에게 질문지를 보내서 20세기의 100년을 빛낸 가장 위대한 인물을 선택해달라고 요구를 했다. 그 결과 1위가 프로이트였고 2위가 아인슈타인이었다. 1999년 3월 29일자 TIME지의 표지에는 아인슈타인이 환자로 프로이트의 치료실인 카우치에 누워있고 프로이트가 치료를 하는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이 앞면 표지로 나왔다. 프로이트는 20세기가 시작될 때 이미 20세기를 대표하는 3명의 위대한 사상가로써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로 뽑혀 있었다(TIME, 1999).

 1895년에 프로이트와 브로이어가 합작으로 출판한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Study on hysteria)와 1900년에 출판한 꿈의 해석(Intepretation of dreams)으로 하루 아침에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평생동안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으로 정신분석학을 탄생시킨 사람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로써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에릭 프롬은 프로이트를 가리켜 100년-2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로써 앞으로 100년 안에 프로이트 이론을 뒤짚어엎을 이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100년 전에 만든 프로이트의 마음에 대한 설명은 시간이 갈수록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 되어지면서 프로이트의  업적이 더욱더 시간이 갈수록 그 진가를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3살 때부터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제자들에 의해서 영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인 83세까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독일어로 빈)에서 살았다. 나치의 박해가 심해지자 제자들이 프로이트의 반대를 무릎쓰고 프로이트를 변장시켜서 기차를 통해서 런던으로 가던 도중에 파리를 지나갈 때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가 파리에서 마중을 나올 정도로 세계적인 명사가 되어있었다. 런던 망명지에서 2차 세계대전 발발 1주일 전에 오스트리아 망명 정부의 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신경과 의사이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자로 널리 알려져있다. 사실은 그가 의사로써 자신의 전공에 합당한 환자를 치료한 적이 없는 의사이다. 그가 개업을 해서 처음으로 만난 환자가 프로이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써 책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으로 법대를 가려고 했으나 유태인이라는 차별 때문에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그 당시에 5년째였던 의과대학을 8년 만에 졸업을 했다. 해부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 3년을 해부학 교실 연구 조교로 공부를 더 한 것이었다. 같은 유태인으로써 학교 시절부터 프로이트에게 선배겸, 스승겸, 친구로써 프로이트를 돌보아주었던 브로이어(Breuer)가 프로이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브로이어가 해부학 연구 조교로 있다가 프로이트를 소개해주었고 졸업 후에 개업을 한 후에 새내기 의사로써 환자가 없어서 환자를 빌려달라고 브로이어 한데 가서 환자를 한사람 빌리게 된 것이 프로이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뀌게 한 Anna O(가명)라는 히스테리아 환자였다(Ellenberg, 1970).

 안나 O는 이상한 병을 가진 환자였다. 한번씩 눈이 보이지 않고(신경증 장님 현상), 컵에 들어있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바늘로 손을 찔러도 손에 감각이 없고(신경증 마비 현상), 한번씩 말을 할 수 없고(신경증 실어증), 손가락이 뱀의 머리로 보이는 여러 가지의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8년 동안에 배운 의학적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안나 O는 생리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런 환자를 그 당시에 히스테리아 환자라고 불렀다. 안나 O가 무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유태인 백만장자의 딸로써 5개 국어 즉 모국어인 독일어, 불어, 영어, 이태리어, 유태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22세의 인테리 아가씨였다. 안나 O는 브로이어가 치료를 2년 동안 해 오던 환자였고 프로이트의 요청으로 이 환자를 프로이트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브로이어한데 가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 환자를 치료를 했는지 자문을 구하게 되었고 브로이어는 최면으로 치료를 했다고 일어주었다. 프로이트는 1884년에 최면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프랑스 파리로 1년동안 유학을 떠나게 된다(Ellenberg, 1970).

 프랑스 파리에는 그 당시에 "히스테리아의 황제"로 이름난 가르코트(Charcot)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주치의였고 의과대학 내과 교수로 그 당시 파리의 정신과 의사들의 대부로 통하고 있었다. 그는 36세 때 프랑스의 살페트리에 국립 병원에 원장이 되었다. 그가 취임하기 이전에 살페트리에 병원은 4000명의 부랑아, 매춘부, 걸인들을 돌보아주는 합숙소와 같은 감금 시설이었다. 가르코트가 취임을 하면서 살페트리에 병원은 일략 새로운 치료의 실험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최면학으로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고 살페트리에를 히스테리아 연구의 산실로 만든 것이었다. 처음으로 치료실, 진료실, 교육실을 만든 사람이었다. 지금은 이런 시설들이 별 것아니지만 그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간호사들을 종교와 관계없이 실력에 따라서 체용하였고 직접 최면을 걸어서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실습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실험이 알려지면서 가르코트는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히스테리아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요일에는 전 세계의 명사들이 모인 강당에서 직접 강연을 했고, 목요일에는 제자들이 모는 앞에서 직접 히스테리아 치료 시범을 보여주었다(Ellenberg, 1970).

 이후에 프로이트가 이것을 모방하여 정신분석학자들의 수요일 모임을 운영하면서 이것이 국제정신분석 학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가르코트는 과학자이자 의사이자 예술인으로 못하는 연주가 없었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를 집으로 초빙하여 같이 연주를 할만큼 예술까로써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가르코트는 파스테르와 더불어 프랑스가 자랑하는 2대 과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사망 후에는 프랑스 파리의 국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렀으며 가르코트의 강연을 제자들이 받아적어서 사후에 15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Ellenberg, 1970).

 가르코트의 최면학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석학들이 프랑스의 파리로 모여들 게 되었고 이 중에서 심리학의 대가가 될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정신분석학을 창설한 프로이트, 미국에 처음으로 심리학을 강의한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암 제임즈(William James), 해리장애로써 새롭게 재 조명을 받고 있는 프랑스인 피에르 장(Pierre Janet)이 바로 그들이다. 그 당시에 가르코트가 프로이트를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프로이트는 이름없는 새내기 의사였고 가르코트의 병원을 방문하는 세계의 수많은 석학들 중에서 가르코트가 프로이트라는 사람을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프로이트는 1년 후에 최면학을 배워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되돌아와서 가르코트의 프랑어 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소개하기도 했고 자신의 가르코트의 제자로 자랑을 하기도 했다고 제자들이 전하고 있다(Ellenberg, 1970).

 히스테리아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붙인 이름이었다. "히스테리아"(hysteria)라는 말은 그리스어도 "자궁"이라는 뜻으로 자궁이 몸 속에 돌아다니며 일으키는 병으로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여성의 병, 섹스와 관련된 병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후에 중세로 들어서면서 기독교 시대에 히스테리아는 "마녀" "악령" "귀신"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히스테리아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A.D. 5세기부터 1500년까지 히스테리아는 귀신과 악령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사람을 마녀로 만드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14세기-17세기까지 유럽에서 마녀로 처형된 여성들이 10만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있다. 스콧틀랜드에서는 3만명이 마녀로 오인받아서 화형으로 처형되었고 제네바에서는 3개월 만에 300명이 화형으로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도 "마녀 사냥"(witch craft, witch hunting)이라는 말이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Ellenberg, 1970).

 최면학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메즈머(Mesmer)가 발견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1772년에 신부인 가스너(Gassner)가 마녀를 쫒아내는 굿 즉 에소시즘(exorcism)을 하여 귀신을 몸에서 쫓아내어 치료를 한다는 소문이 펴지면서 사람들이 구경삼아 모여들 게 되었고 가스너(Gassner)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성격책과 십자가와 신부 옷을 입고 마녀에게 다가가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십자가를 마녀의 몸에 갇다대면 귀신이 걸린 사람은 발짝으로 몸부림을 치며 발악을 하게 되는 장면들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고 돌아다니자 오스트리아의 케토릭 교구에서 진상 조사 위원회가 열려 가스너를 대상으로 수사를 하게 되었고 그 수사 위원으로 메즈머가 등장하게 된다(Ellenberg, 1970).

 메즈머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로써 가스너가 직접 시범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성경책과 십자가가 없이도 내 손가락 한 개로서 똑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장담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람들 앞에서 직접 보여주게 된 것이 최면학을 발견하게 된 동기였다. 이후에 가스너는 케토릭 교구에서 신부로 되돌아가서 정해진 지역구를 벗어나지 말 것을 명령받았고 가스너와 메스머의 대결은 메스머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메즈머는 자신의 이론을 책으로 출판해서 오스트리아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결과를 가져왔다. 메즈머의 이론은 동물 자장이론으로 나와있다. 영어 사전에서 메즈머의 이름을 찾으면 동물 자장이론, 유체 이론으로 설명되어있다. 메즈머의 이론은 그 당시 18세기의 전기와 자장 이론의 등장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사람들을 최면을 걸어서 마치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사람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은 최면을 신비의 힘으로 보게 된 것이다. 메즈머는 자신이 최면을 발견했다는 것을 자신이 몰랐다.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죽은 사람이 콜롬버스와 메즈머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메즈머의 인기가 폭발하여 수 많은 의사, 변호사, 정치가들이 메즈머가 새로 발견한 동물 자장이론을 배우겠다고 몰려들게 되었다. 메즈머는 자신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톤에 버금가는 위대한 새로운 유체 이론이라고 자만했다(Ellenberg, 1970).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의 귀에 들어갔고 여황제의 시종이 18세되는 장님 음악 악사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의 요청에 자신있다고 대답하며 메즈머가 황실에 들아거서 장님 아기씨에게 최면을 걸자 아기씨가 눈에 보인다면 눈을 떴다고 좋아했으나 다음날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사기꾼으로 매도된 매즈머는 프랑스로 들어가게 되었고 프랑스에서 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프랑스 황제의 동생이 메즈머의 최면을 배워서 사람들을 치료하자 메즈머가 자신이 고안한 것을 훔쳐갔다며 시기 질투로 서로 앙숙이 되었고 프랑스에서 진상 조사 위원회가 열리게 되어 7명의 전문 위원들로 구성된 조사팀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청문회의 결과 보고에서 실제로 메즈머가 주장하는 유체가 몸과 몸 사이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또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이론은 아니지만 치료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있다는 발표에 실망해서 메즈머는 독일의 고향으로 들어가서 이름없이 사라졌다(Ellenberg, 1970).

 이후에 메즈머의 제자들이 메즈머의 발견이 심리적인 힘에 의한 최면이라는 것을 밝혀내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후에 의대대학 내과 교수인 가르코트와 역시 의과대학에 내과 교수인 베른헤임에 의해서 부활이 되었고 최면학(hypnosis)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병원에서 환자의 심리치료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르코트가 어떻게 최면학을 배우게 되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가 파리에 유학을 갈 당시에는 프랑스에서는 최면 학교가 두 개가 있었다. 가르코트 학교(Charcot School)와 낸시 학교(Nancy School)였다. 두 사람은 최면학에 쌍벽으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되었고 학파가 갈리게 된 것이다. 베른헤임은 의과대학 내과 교수로 재직 중에 낸시(Nancy)에 있는 리보라는 과짜 의사가 사람을 이상하게 치료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 사람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최면에 매료되어 최면학 교과서를 쓰고 최면의 대가가 되게 되었다. 지역의 이름을 따서 낸시 학교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가르코트가 제자들에게 히스테리아 환자 시범을 보이면서 건강한 제자들을 불러내어 최면을 걸어서 팔에 감각이 없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면서 최면이 히스테리아이고 히스테리아가 최면이다는 주장을 펴게 되었고 베른헤임은 최면은 제시에 의한 것이고 히스테리아는 병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게 되어 두 개의 학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었다(Ellenberg, 1970).

 이후에 가르코트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최면은 제시에 의한 것이고 히스테리아는 병이라는 베른헤임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프로이트는 1884년에 가르코트 학교에서 1년간 유학을 했고 5년 후에 1889년에 다시 낸시 학교를 방문해서 베른헤임을 만나고 베른헤임이 최면을 건 후에 최면학에서 깨어난 환자가 기억을 하지 못하자 베른헤임이 기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면 조용히 기억해보라고 하자 기억을 재생해내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것이 이후에 정신분석의 탄생으로 이어진다(Ellenberg, 1970).

 메즈머와 가르코트와 베른헤임과 같은 최면 학자들이 히스테리아라는 그리스의 병을 다시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의미가 깊다. 중세의 귀신 이론은 무지, 미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의 산물로 본다. 히스테리아는 귀신이 몸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병이라는 것을 메즈머가 밝혀냈고 이것을 최면으로 치료를 한 것이다. 메즈머는 최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체 이론으로 설명했다. 유체가 우주, 지구 사이를 흐른다, 질병은 인간이 몸둥이의 유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어떤 도구의 도움으로 유체가 균형을 가져와 병이 치료 된다. 유체의 극대화를 위해서 집단 최면이 처음으로 시도되었고 이것이 그룹 치료의 원조가 되었다. 또 라포 즉 rapport라는 금속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 당시 라이덴 병의 전기 이론을 인용하여 환자들를 가리키며 유체가 건강한 메즈머의 몸에서 환자의 몸으로 이동하여 병이 치료 된다고 보고 이 라포 막대를 이용하였다. 이 라포라는 용어는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실제로 유체가 몸에서 몸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환자와 치료자 사이에 심리적인 관계로 밝혀지게 되어 지금도 상담이나 치료에서 최면학의 용어인 라포가 사용되고 있다(Ellenberg, 1970).

 메즈머의 이론은 대부분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그가 히스테리아는 병이고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가르코트에 의해서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성폭행, 근친상간에 의한 심리적 상처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그것이 프로이트에 의해서 히스테리아의 원인인 심리적 상처가 과학적인 설명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0).

 히스테리아가 18세기와 19세기에 유행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당시는 빅토리아 시대로 섹스에 대한 금기, 섹스 욕구에 대한 처벌, 금욕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섹스 억압과 섹스 상처에서 오는 병이라는 것을 가르코트가 히스테리아 환자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최면 상태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고 이 기억들이 대부분이 성폭행, 근친상간, 성추행 등 섹스 상처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르코트가 입증을 한 것이었다. 즉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섹스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였고 프로이트가 최면에 걸린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보게된 것이다. 이후에 최면이 깬 상태에서 환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지 못했다. 프로이트가 이것을 보고 기억을 할 수 있는 것과 기억을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의식과 무의식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되돌아와서 히스테리아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를 하다가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최면 치료가 반쪽 치료라는 것을 알고 최면과 유사한 새로운 치료기법을 고안했으니 이것이 정신분석 치료기법이 된 것이다(Herman, 1997).

 히스테리아(hysteria)라는 용어는 20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여성들만 걸리는 병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과 관계있다. 전투에서 군인들이 히스테리아와 유사한 증세를 보이면서 울거나, 마비가 되거나, 불면증에 걸리거나 악몽을 꾸거나 벌벌떨거나, 기억 상실증 등의 증세가 히스테리아와 유사하다는 것이 보고 되면서 정신과 의사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것을 10년 동안 연구한 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아브라함 가니너였다. 1941년에 미국의 아브라함 가디너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모아서 "전쟁의 상처 신경증"(The neurosis of war)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가디너는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군인들의 증세를 치료하면서 군인들이 히스테리아와 유사한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미 1차 세게 대전 후에 많은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서 포탄 쇼크, 혹은 전투 신경증 등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전쟁 군인들이 휴유증을 겪는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관심을 쏟게 되면서 건강한 군인들과 전투에 오래 노출되면 히스테리아와 유사한 증세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Herman, 1997).

 프로이트는 최면 치료를 사용하면서 히스테리아 환자들이 어린 시절에 받은 근친상간, 성폭행 등 섹스 학대가 히스테리아의 원인임을 알고 이것을 유혹 이론으로 발표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환자들의 어린 시절에 섹스 학대를 증명할 길이 없었고 가해자는 완강히 부인을 하게 되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망 있는 귀족 가문에서 발생한 히스테리아 환자 때문에 가족들 중에 가해자가 파렴치범으로 몰리게 되어 사회적 물의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환자들이 실제 상처를 받아서 생긴 것이라기 보다도 상상에 의한 기억의 왜곡 이론으로 오디프스 콤프렉스가 탄생하게 되었다(Herman, 1997).

가르코트와 프로이트가 처음에 주장한 히스테리아의 원인이 실제 섹스로 인한 상처라는 것은 그대로 묻혀벼리게 된다. 그러나 이 학대, 상처 이론은 1970년대에 와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1970년대에 여성 운동가들이 민권 운동으로 시작한 여성 폭력, 가정 폭력, 어린이 학대 등에 대한 폭로 운동과 매맞는 여성 증후군, 매맞는 어린이 증후군 등으로 연구가 쏟아져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Herman, 1997).

1960년 후반기부터 여성 운동가의 대부인 베티 프레디안(Betty Friedan) 여사가 뉴욕을 중심으로 창살 없는 감옥으로 가정을 비유하면서 "침묵에서 깨어나자" "여성들이여 자각하라"는 의식적 자각 운동을 벌리게 되었고 여기에 호응해서 여성 운동가들의 강간의 폭로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0년에 미국 여성 운동 동맹이 결성되었고 강간을 성행위가 아닌 성폭행 범죄로 입안한 법안이 뉴욕주를 통과하면서 10년 안에 미국의 50개 주를 통과하게 되었다. 강간이라는 용어가 성폭행 범죄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74년에 보스톤 시립병원에 심리치료 전문가로 있던 앤 부르게네스와 린다 홀스트롬이 강간 상처 증후군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성폭행의 휴유증이 히스테리아 증세와 유사한 점을 밝혀낸 것이다. 악몽, 놀램, 프레쉬백 현상, 상처의 기억 상실 등을 보고 했다. 1975년에 미국 국립 건강 연구소에서 "성폭행 연구소가 설립" 되었다. 1976년에 브랏셀에서 여성에 대한 국제 범죄 조사국이 설립되었고 1980년에 사회학자이자 인권 운동가인 다이아나 럿셀이 900명의 건강한 여성들을 설문 조사한 결과 미국 여성들 중에 4명 중에 1명 성폭행을 당했고, 3명 중에 1명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연구 결과가 전 미국 국민을 놀라게 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 성폭행, 여성 학대, 어린이 학대 등의 실체 상처로 인한 정신장애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나오게 되었다(Herman, 1997).

 전쟁 신경증과 히스테리아와 성폭행의 증후군들이 유사하다는 연구 보고서가 나오고 히스테리아는 이제 여성들만의 장애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히스테리아(hysteria)라는 용어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980년에 제 3차 개정판으로 출판된 DSM-Ⅲ에서 히스테리아는 사라지고 대신에 상처후 스트레스 장애, 전환 장애, 신체화 장애, 해리 장애 등으로 세분화 되었다. 히스테리아가 사라지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섹스 해방으로 섹스에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섹스 욕구를 건강한 욕구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섹스 억압으로 인한 히스테리아의 발생 빈도수가 줄어들게된 것이다. 프로이트 시대와는 시대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Herman,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