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 Too) 운동과 정신분석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산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미투 운동은 정신분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투 운동이 정신분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미투 운동의 정의를 위키피아(세계적인 인터넷 백과 사전의 준말)에서 인용하고자 한다.

미투 운동(영어: Me Too movement, #MeToo)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이다. 2017 10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성희롱 행위를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를 끌게  해시태그(#MeToo)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다(위키피아, 2018, 4, 8).

 미투 운동은 성폭력, 성희롱, 성추행에 관계된 여성 피해자들의 폭로 운동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즉 섹스와 관계된 문제이다. 정신분석의 절반이 섹스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프로이트가 1895년에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들이 출판되어지면서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을 했다는 것은 이미 수 차례 여러 개의 글들에서 밝혔다. 이후에 1900년에 꿈 해석이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전 세계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무의식의 탐색 그리고 오디프스 콤플렉스에 경탄하고 깜짝 놀랬다. 한마디로 20세의 시작과 더불어 새로운 학문의 시대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후 10년 동안 정신분석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지고 1910년의 시점에서 정신분석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차례 글들에서 밝혔다(Ellenberger, 1970, Jones, 1953, 1955, 1957: (주㈜: 참고).

이 시점에서 유럽에서는 너도나도 정신분석을 공부하겠다고 몰려들고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신경증의 치료 기법이 유행을 하게 되면서 정신분석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게 되자 드디어 프로이트가 경고를 하고 나섰다. 1910년에 야생 분석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는 스스로 정신분석은 섹스심리학(Psychosexual)이라고 천명을 하고 아무나 정신분석을 해서는 안 되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임을 천명을 했다. 그 당시에는 정신분석학교가 없었다. 이후에 제자들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정신분석 학교가 생겨나고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면서 정신분석가는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대부분이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들이 후보자) 정신분석가로부터 4-5년간 개인 분석 치료를 받아서 최종으로 자격증을 제공하게 되는 과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미국에서는 1950년대까지 의사들만 자격이 부여 되었으나 이후에 의사들, 심리학자들, 사회 복지사들, 정신의학에 5 이상 경험이 있는 간호사들에게 정신분석 학교에 입학 자격이 주어지도록 법률로 개정).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섹스심리학이 바탕으로 된 학문으로 절반이 섹스에 관계된 학문이 된 것은 프로이트가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레지던트 시절의 마지막 해에 비엔나 의과대학에서 3명의 우수한 레지던트 학생들을 선발해서 해외 유학이라는 6개월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프로이트가 그 3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고 프로이트는 프랑스에서 히스테리아(그 당시 정신병의 이름)의 대가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가르코트(Charcot)의 최면학(치료 기법)을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최면에 걸린 히스테리아 환자가 어린 시절에 근친상간, 강간, 폭력의 상처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고 또 가르코트가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근친상간, 강간, 폭력과 학대로 인한 심리적인 상처라는 것을 눈으로 보고 듣고 그리고 가르코트로부터 앞으로 그 분야를 연구해 보라는 조언을 듣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수 차례의 글에서 밝혔다.

이후에 프로이트가 10년 동안 히스테리아 신경증, 불안신경증, 강박 신경증, 그리고 신경쇠약 신경증의 치료와 원인을 연구하면서 이들 신경증들이 모두 그들의 핵심 상처가 어린 시절의 섹스의 상처라는 논문들을 계속해서 발표하면서 전 세계가 경악하게 되었다. 정신분석의 반대파들이 프로이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독일의 과학계와 의학계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독일어가 모국어)은 실험 증명을 할 수 없는 소설적인 이론으로 상상 속에서 나온 허구이다 라고 공격을 퍼 붙기 시작했다. 히스테리아 환자가 어린 시절에 섹스적인 폭력을 당했다면 그들의 부모, 형제, 지인들은 전부가 변태성욕자라는 말인가? 히스테리아는 모든 사회 계층들 안에서 발생하는 정신병으로 귀족, 고위층 등의 신분을 가진 부모들로부터 고소, 고발의 위험을 당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몇 사람이 히스테리아 치료 때문에 부모와 사회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그리고 미국과 영국(초반기)에서는 섹스에 관계된 정신분석의 논문은 거부당했고 미국의 보스톤에서는 경찰에 고발당했고 오스트랄리아(호주) 에서는 한 기독교 목사가 정신분석을 공부하다가 목사 직책에서 파면 당했다, 스위스에게 캐토릭 신부인 정신분석가 오스카 피스터(Oska Pfister)가 교구에서 문책을 당하게 되었다(Ellenberger, 1970, Jones, 1953, 1955, 1957: (주㈜: 참고).

그 당시 유럽은 빅토리아 시대로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처럼 섹스의 이름도 거론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특별히 1905년에 발표된 프로이트의 유명한 논문 성욕에 관계된 3개의 소 논문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발표된 유아 성욕 이론이 화약고 역할을 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용어들 특별히 오디프스 컴플레스, 리비도 이론, 유아 성욕 이론, 꿈 분석, 등의 용어들이 직격탄을 맡게 되었다. 일부 제자들 즉 융(Jung) 1913년 그리고 에들러(Adler) 1911년에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이론에 반발해서 프로이트와 결별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압력으로 프로이트는 신경증들의 원인이 어린 시절에 실제로 섹스의 상처의 결과라는 초반기 유혹 이론으로부터 어린이들이 상상 속에서 이성 부모와 관계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결과로 수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이 오디프스 콤플렉스의 이론으로 등장을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가 닫아버린 결과라고 역동적 정신 의학의 역사가들이 말을 하고 있다(Ellenberger, 1970, Jones, 1953, 1955, 1957: (주㈜: 참고).

다시 미투 운동으로 되돌아가 보자, 하버드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허만(Herman, 1997: 주㈜: 참고)은 그녀의 저서 마음의 상처와 회복에서 섹스의 상처와 미국 여성 운동을 다음과 같이 노트하고 있다. 그녀는 강간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성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그리고 섹스의 실제 상처가 정신분석에 핵심이 되었는지를 노트하고 있다. 그녀의 저서로 미루어 볼 때 사실 미투 운동의 뿌리는 이미 1966년에 전국 여성 연맹의 회장이 된 미국의 여성 운동가인 베티 프레디안(Betty Friedan)여사와 관계가 있다. 프레디안 여사는 여성들이여 끼어나라! 가정이 창살 없는 감옥(가정 폭력의 등장)이 될 수 있다.”라고 외치면서 여성 자각 운동을 전개를 했다. 우리 여성들 스스로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강간, 폭력, 학대를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상하면서 1970년에 여성 폭로 운동의 불을 당겼다. 1971년에 뉴욕을 중심으로 해서 강간에 대한 폭로 운동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인 아버지로(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부터 강간을 당한 셀리(Shelly)양의 폭로로 시작되어져서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이 민권 운동(Civil Right)으로 번지게 되었다고 허만은 노트하고 있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유혹 이론이 100년 만에 다시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정신분석가들 사이에서 실제 섹스의 상처들에 대한 연구가 등장했던 가르코트와 프로이트의 연구의 부활을 주장하고 나섰다.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이 시점에서 프로이트의 유혹 이론을 재점검하고 새롭게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Herman, 1997: 주㈜: 참고).

여기에서 한가지 강간이 왜 성폭행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계기를 한번 살펴 보자, 허만 교수는 그녀의 저서에서 정신분석가들이 신경증의 치료를 하면서 근친상간과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의 치료가 절벽에 부딪친 것에서 절망하게 되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나는 순결을 잃었다.” “나는 석녀(石女)이다, 나는 더럽혀졌다”, “나는 깨끗하지 못하라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었다, 신체적인 상처는 몇 개월이 지나가면 회복되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신적인 상처는 평생을 간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강간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을 주장했다. 강간은 강제로 섹스 관계를 가진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강제로 섹스 관계를 가진 것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섹스가 아니다. 섹스는 서로 합의하게 동의하게 섹스를 가지는 것인데 강제로 폭력으로 강압으로 당한 것은 섹스가 아니다, 폭력이다 라고 주장을 하게 되면서 이 용어 가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면서 이것이 이후에 여성운동가들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 불어 닥친 여성 운동과 민권 운동이 뉴욕 주에서 강간을 성폭력으로 바뀌는 법률 안이 통과 되었고 이후 10년 만에 미국의 50개 주에서 성폭력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언론, TV 등에서 강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Herman, 1997).

정신분석가들, 심리학자들 그리고 사회학자들의 실제 성폭력의 상처의 연구를 잠깐 들여다 보자. 1972년에 보스톤 시립 병원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엔 부르게네스(Ann Burgess)와 사회학자인 린다 스톡홀롬(Lynda Holmstrom)강간에 대한 심리적 상처 효과에 대한 연구가 보고 되었다. 강간의 피해자는 불면증, 메스꺼움, 구역질, 놀람 반응, 악몽과 해리, 무감각의 증세들을 느낀다고 발표되었다. 길거리에서 강간,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강간, 동료들에 의해서 강간, 데이트 강간 그리고 결혼에서 부부 강간에 대한 연구로 발전해 갔다(Herman, 1997).

1975년에 미국의 국립 정신건강 연구소 내에서 성폭력 연구소가 설립이 되었고 1976년에 브랏셀에서 여성에 대한 국제 범죄 조사국이 설립이 되었다. 1980년에 사회학자이나 인권 운동가인 다이아나 레셀(Diana Russel)에 의해서 900명의 여성들을 임의 추출 형식으로 선발해서 가족 폭력과 섹스 착취에 대한 심층 연구로부터 놀라운 결과가 드러났다. 4명 중의 1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3명 중의 1 명이 어린 시절에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간에 대한 대중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이었다. 여성 운동가들은 강간을 섹스 행동이 아닌 섹스 폭력으로 범죄로 재 정의를 했다. 강간을 남성들에 의해서 폭력을 통한 여성 길들이기로 재정의가 내려졌다.

이런 운동들은 가족 내 폭력의 연구로 이어졌다. 매맞는 여성 그리고 어린이의 성폭력으로 가족 폭력과 어린이 섹스 학대의 심리적 탐색이 심리 상처 증후군의 재발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980년에 정신의학에 대한 통계와 진단 분류 지침서인 제 3 차 개정안 DSM-Ⅲ 에서 성폭력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소속). 미국 전국에서 학대 받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임시 피난처로 셀트(Shelter)(우리나라 말로 쉼터)가 미국 전국에 2000여 개가 설립이 되었다. 심리학자, 워크(Walker)는 쉼터로(Shelter)로 도망한 여성들을 매맞는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 실제 섹스 상처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졌다. 뉴욕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센골드 (Shengold, 1989, 1999: 주㈜: 참고) 는 평생 동안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치료하고 연구를 하면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영혼을 살해당한 사람으로 재 정의를 했다.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면 평생 동안 정신적인 장애자, 정신적인 불구로 살아갈 수 있다고 경고한 그의 저서 영혼의 살인(1989)” “영혼의 살이 재방문(1999)”이라는 저서에서 강조를 하고 있다. 특별히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삶이 붕괴되고 파괴되어 회복의 어려움을 노트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을 많은 정신분석가들에 의해서 제기되어졌다. 뉴욕의과 대학에서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파라웰리(Farwley, 1994: 주㈜: 참고)는 그녀의 저서 어린 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어른의 치료에서 어린 시절에 성폭행의 상처가 삶을 망가뜨리는 살인적인 분노로 연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 하고 있다.

이런 정신분석가들과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연구들과 주장의 일환으로 최근에 미국에서는 어린이들의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50 100년 혹은 종신형의 형벌이 내려지고 있다 보고하고 있다. 관련된 신문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SBS 8시 뉴스>

앵커

2년 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0살 날 소녀가 보모의 남자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범인인 42살 남성에서는 지난 8월에 징역 120년이 선고 됐습니다. 남자 친구의 협박에 못 이겨 성폭행을 당한 성폭행을 방조한 보모도 징역 25년의 중형을 받았습니다. 성범죄, 특이 하동 성범죄에 대한 미국의 처벌은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아동 성폭행의 경우 보통 납치, 폭행 등의 네댓 가지 혐의를 함께 적용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종신형이 선고 됩니다.

데이비드 백/캘리포니아 변호사: 아동 성범죄는 그 자체, 예를 들어서 성적인 이유로써 가슴을 만졌다. 허벅지를 만졌다. 그 자체 만으로 해도 상황에 따라서 전과가 있거나 그런 경우에 종신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동이 나오는 음란물을 컴퓨터에 보관하고 있다가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유럽 영화계의 거물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32년 전에 미국에서 13살 소녀를 성폭행했다가 지난 달 26일 스위스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아등 성범죄에 관한 한 용서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 범죄자는 체포 단계에서부터 신원이 공개되면 형기를 마쳐도 철저히 감시 받고 여차하면 다시 보호시절에 수감됩니다.

한 마디로 성 범죄자, 특히 아동 성범죄자는 사회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입니다.

다시 미투 운동으로 되돌아가 보자. 최근에 산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치료자(필자) 10년 전에 대학의 강단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가 떠 오른다. 우리 나라에서 성폭행 범죄들이 보고되어지지 않고 조용한 것은 사건이 없어서가 아니고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부끄러움, 수치심, 멸시, 조롱 때문에 피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적인 편견 때문에 묻혀있을 뿐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이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라고 경고한 말이 꼭 10년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제 봇물처럼 터져 나오 있는 것을 보면서 이제 내가 섹스와 섹스 치료”(가상 제목)에 대한 책을 쓸 시점이 왔다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 치료자는 2015년에 인사이드 아웃의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 상영되면서 마음 속의 여러 개의 자아가 의인화 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기술한 그 영화에 우리나라의 관객이 3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신문, TV를 보고를 보고 자아에 대한 두 번째 책을 쓰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 서적들(첫 번째 저서는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한림미디어, 1999)인사이드 아웃으로부터 본 내면의 세계분석 치료의 정석이라는 2권의 책이 하나 의학사에 의해서 출판 허락을 받고 첫 번째 출판 교정을 지난 주일에 끝냈기 때문에 몇 개 월 후에 책이 출판될 것이다)섹스에 대한 담론이 일어나고 섹스에 사회적 인식이 변화되고 섹스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치료자는 미국에서 대학, 대학원, 전문의대학(인턴십)을 다니면서 심리치료를 공부할 때 심리치료사는 반드시 섹스학을 10학점 이상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대학 학부에서 섹스학(인간의 섹스) 과목을 이수를 했고 그리고 대학원에서 섹스 심리학(섹스 장애들에 대한 치료학)을 이수를 했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정신분석의 절반이 섹스학과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섹스학을 10학점 이상을 이수를 하면서 섹스학에 대한 철저한 공부를 했다.

섹스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부산의 부경 대학에서 20년 동안 심리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섹스학에 대한 강의를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본격적인 강의를 하지 않았던 것은 학생들이 과연 섹스학에 대한 강의를 수용할 수 있는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개의 일화로 치료자가 한국에 도착해서 부산 지역에서 가장 큰 신문사인 부산일보의 광고부 기자를 불러서 신문의 만화 만평 밑에 조그만 광고를 내려고 부탁을 했다. “섹스학 특강: 심리상담사, 심리치료사, 일반 학부모라는 제목으로 만화 밑에 조그만 광고를 부탁을 했다(그 당시 46만원의 광고료).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왜냐하면 섹스라는 말이 들어가면 학부모들로부터 항의 전화 때문에 전화통이 불통이 나서 광고를 실어줄 수 없다고 했다. 치료자가 한번 더 제고를 부탁했을 때 그는 치료사의 치료실에서 직접 편집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한 결과 편집국장은 절대불가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섹스라는 말이 들어간 기사를 쓰면 신문사가 견디어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에 학생들에게 강의의 과정에서 섹스 치료의 치료 사례들을 통해서 심리적인 상처 들 특별히 섹스의 상처들이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강의를 해 나갔고 학생들에게 최고의 강의로 이름이 나면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을 했다(참고로 그 당시에는 건축과, 유아 교육과, 패션 디자인 학과를 제외하면 심리학은 선택 과목). 최고의 대형 강의실에 정원 100명의 학생들이 넘쳐나서 주로 4학년과 3학년들이 졸업 직전에 들어야 할 과목으로 인기가 있었다. 4학년 순서로 강의 등록이 시작되기 때문에 100명의 수강 정원이 마감됨으로써 1학년들이 수강하지 못하게 되자 개별 면담으로 특별 수강을 신청했다. 교수의 허락이 있으면 100명의 정원에서 약 10명 정도 추가 등록이 가능했다. 대형 강의실은 초만원이었고 마이크를 들고 강의를 해야 했다. 100명의 학생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들었다. 그 당시 대학 개교 반세기 기념일에 대학 학보사가 졸업생들 200명에게 당신이 학교 시설에 가장 인상 깊었던 교수님의 강의와 래포트를 적어 보세요라는 설문조사에서 1 등으로 김종만 교수님의 심리학 강의와 꿈 분석 레포트가 선정되었다고 학보사로부터 축화 전화를 받았고 학생들의 꿈 분석 작품을 신문에 실어주겠다고 제의를 받았다. 치료자는 중간 고사 혹은 기말 고사로 A4 용지로 10페이지-15페이지의 분량으로 서론, 본론, 결론의 특강을 통해서 자신의 무의식을 분석해 오는 과제를 실시했었다.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한 학생의 수강 소감을 소개하고자 한다.

xxx| 조회 12 |추천 0 | 2002.02.1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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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메세지] ---------------------
저는 99년도에 김종만 교수님 심리학을 들었거든요...
나는 무지 재밌었는데...
근데... 그때는 주로 성심리학을 배웠죠...
중고등학교때 배운 성에 관련된 지식에 비해 양적으로 우월하고 질적으로도 보다깊은 정보를 얻을수 있는 뜻깊고 알찬 수업이었던것 같아요...
xx
오빠가 들으면 무지 좋아할거야...
이상한 변태성욕의 종류를 강의하시면서 그에 대한 예를 자세히 들어주시던게 가장 인상에 남구요...
또 성적 리비도가 강한 사람이 사회적 리비도가 강하다면서...
부인 많이 둔 세종대왕같은 분들 예로 든 것도 생각나고....
근데....
일학년때 들어서그런지...
아니면 리포트를 안하고 괜히 시험을 봐서 그런지...
학점을 몬받았지요....
언니는 심리학 들을려면.... 꼭 리포트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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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자가 섹스 심리학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대학에서 섹스학 강의(치료자는 강의 제목이 섹스학이 아니고 심리학 개론을 강의하면서 섹스심리학이 강조)가 개설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섹스에 대한 연구를 위한 전문 인력이 양성되지 않고 있어서 안타깝다는 말을 하면서 학생들 중에 누군가가 반드시 이런 분야를 전공을 해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섹스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섹스 학문을 배울 수가 없으니 외국에 유학을 가서 배워 와야 하는데 만약에 유학을 가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를 부모나 친구들이 물어본다면 섹스학을 전공할 것이라고 대답을 했을 때 부모님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고 질문질 던졌을 때 학생들이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박장 대소를 한 것이 기억이 난다.

다시 미투 운동으로 되돌아가 보자. 가해자들은 대부분이 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대부분이 40, 50, 60대로 가정을 가지고 있는 가장이고 자녀들을 둔 아버지이고 그리고 부인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섹스의 욕구가 강한 사춘기의 청년들이 섹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저지르게 된 범죄가 아니라는 점에서 안타깝다. 그것은 분명히 부부 사이에 섹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모든 유명 인사들이 여성들을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부인 한데서 섹스 욕구가 만족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성을 통해서 섹스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고로 이것은 부부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섹스는 부부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측정자로써 바로미터가 된다는 것은 부부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상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친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을 속속 들이 잘 알고 있고, 서로가 마음의 문울 열과 사심 없이 속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개인적인 비밀아 없이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놓은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해도 그들과 신체적인 접족을 가지지 않는다. 고로 섹스적인 친밀감이 가장 강한 친밀감으로 이러한 관계를 나누는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가 아닌가! 부부는 신체적 친밀감을 통해서 사랑을 몸으로 확인하는 즉 몸으로 사랑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이다. 이러한 관계가 차단되고 단절되고 빈곤한 관계가 된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들을 성폭행 성추행 하는 사람들이다. 부부 사이에서 섹스 욕구불만족 때문에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고 섹스 욕망이 다른 채널로 흘러간 것이다.

부부 사이에 섹스 친밀감의 장애물, 방해물의 주범은 바로 부부들의 관계에 있다. 배우자에게 분노, 적대감정, 짜증, , 노여움이 쌓일 때는 섹스관계가 단절된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무기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섹스가 아닌가?  억지로 강압으로 강제로 섹스를 강압하게 되면 부부 사이라고 해도 섹스의 철회, 섹스에 미온적인 태도, 섹스에 욕구불만족으로 섹스 사보다지 가 등장하게 된다. 암암리에 배우자를 섹스욕구 불만족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섹스 오르가슴을 철회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섹스 욕구불만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부부 관계이다.

다시 미투 운동으로 되돌아 가보자, 피해자들은 성폭행, 성추행의 상처를 받은 이후에 10, 20 30년이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고 계속 마음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정신분석가들이 섹스 장애를 치료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이른바 영혼의 살인이라는 말이 그 증거가 아닌가? 피해자들은 성폭행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가해자는 잘 나가는데 피해자인 자신은 친구굴로부터 외톨이(친밀한 친구를 사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 수 있기 때문에)로, 성폭행 단어 혹은 TV에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리게 되고 과거의 상처가 재등장하게 되는 고문을 받아야 한다. 심한 경우에는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삶이 망가져서 결국은 가해자를 살해하는 사건으로 번진 것이 영국의 고전 작품인 "테스"의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에서 김 xx 씨 사건과 김 xx양 사건이 아닌가? xx씨 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웃집 아저씨 집에 심부름을 같다가 성폭행을 당했고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고 친구들을 멀리하고 외톨이가 되었다가 결혼 후에 실패로 삶이 망가진 것에 분노해서 가해자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고 김xx 양 사건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하면서 언니를 아버지가 김 xx 양은 어머니가 데리고 가서 어머니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양부를 만났고 양부가 김 xx양이 8살 때부터  성폭행을 하게 되었고 이후에 그녀가 대학 1학년 학생이 될 때까지 7년 동안 성폭행을 했다. xx양이 이 사실을 남자 친구에게 호소를 했고 남자 친구와 합세해서 양부를 칼로 찔러 살해를 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여성단체에서 보호를 받아서 두 사람은 징역 4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폭력의 결과는 살인적 분노로 이어진다는 증거가 그것이다.

치료자 한에서 성폭력으로 심리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많다. 대부분이 여성들이라고 생각되지만 남자들도 있다.

첫 번째는 치료자의 대학 강의를 들었던 한 여학생이 2학년이 되면서 친한 친구들과 관계가 진전이 없다는 것 때문에 분석 치료를 요청을 했다. 그녀는 남자 친구는 아예 사길 수가 없고 친한 여자 친구와 가까운 사이에 되면서 벌써 세 번째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호소를 했다. 깊은 관계로 진행이 될 때가 되면 반드시 관계가 단절되고 그녀는 원수처럼 변해버린다고 그 원인의 분석을 호소했다. 6개월 정도의 분석 과정에서 그녀의 핵심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촌 형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그리고 6학년 때 먼 삼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이 밝혀졌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쥐약을 먹고 자살 소동을 이야기를 했다.

이후에 3년 동안의 분석 치료 과정에서 그녀의 성폭행 상처로부터 빠져 나와서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고 졸업 시점에서 그녀는 서울시의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녀는 교사로 근무 하면서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 되면 치료사에게 각각 한달 간씩 심리치료를 계속해서 받았다. 이후에 그녀는 결혼을 했고 자녀를 출산해서 아직도 교사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중간에 몇 번 연락이 왔었다.

두 번째는 치료자 한데서 20년 전에 치료를 받았던 대학원 학생인 A씨로 발기부전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사촌과 함께 가족 심부름을 갔다가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촌의 배려로 하루 밤을 여관에 묶게 되면서 사촌과 함께 매춘부를 한 사람씩 데리고 잠을 자게 되었다. 그 때 그는 흥분은 되는데 발기가 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랬다.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 가 없었다. 8년 동안 온갖 방법으로 시도를 했으나 실패를 했다.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40대 후반의 한 외항 선원에 의해서 항문으로 성폭행(동성애 페도필리아(소아 기호증) 남자)을 당한 과거의 상처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상적으로 발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40대 초반의 여성 환자로 그녀는 우울증 때문에 치료를 받게 되었다. 결혼해서 초등학교 6학년의 아들이 있는 부인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절망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분석의 과정에서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이 분석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그 사실을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알리지 못했고 결혼해서 남편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치료자에게 그것을 털어 놓음으로써 핵심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치료자는 성폭행은 성기에 상처를 받은 것이지 순결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더럽혀지지 않았다라는 것을 깨닫고 약 2년 동안의 분석 치료를 통해서 약 25년 동안 자신을 감추고 닫아 놓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남편의 감정 지원으로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제 2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네 번째는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사귀는 사람마다 그녀를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 때문에 치료자에서 6개월 치료 계약을 하고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그녀의 분석의 과정에서 언니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변태성욕자)가 딸의 친구를 성폭행을 한다고 한 것이 큰 딸을 성폭행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언니를 석녀가 되었고 40대 후반에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녀 역시 중년의 한 유부남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항상 비정상적인 이상한 성격의 남자들과 만나게 된다고 호소한 여성이었다.

다섯 번째는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으로 그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반에서 1 2등으로 학급 임원을 했으나 고등학교 시절에 대인관계의 문제로 학업에서 실패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3류 대학(그녀 자신의 표현)를 졸업하고 회사원으로 근무하면서 항상 열등감과 남자 친구를 사귈 수가 없어 치료자에게 1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분석의 과정에서 그녀는 중학교 1학년 때 IMF로 은행원이었던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서 아버지의 요청으로 아버지에게 신체적인 안마(마사지)를 해 주다가 아버지의 성기가 발기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래서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을 했다. 아버지는 여러 번 딸로부터 신체 마사지를 받게 되면서 발기를 하게 되었고 이것을 즐기는 것을 눈치챈 딸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처 때문에 그녀는 고교 시설에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몇몇 상담실을 찾아갔으나 섹스 문제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고 섹스 문제를 슬쩍 이야기를 해도 그들을 수용해주지 않았고 분개했다.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섹스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1년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그녀는 섹스적인 상처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직장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이 작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성폭행 이외에도 다른 섹스적인 문제들 즉 발기부전 문제, 자위행위 강박증(남성들 뿐만 아니고 여성들도 많음), 변태성욕들(조루, 지루를 가진 사람들), 섹스 욕구가 아예 없는 사람, 동성애 치료 등등의 많은 치료 사례들은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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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엘렌버그(Ellenberger, 1970)의 역동적 정의의학의 역사

            어네스트 존(Ernres Jones,)의 프로이트의 삶과 전기 제 Ⅰ권(1953), 제 Ⅱ권(1955), 제 Ⅲ권(1957)

            허만(Herman, 1997)의 마음의 상처와 회복

            파라웰리(Farwley, 1994)의 어린 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어른들의 치료

            센골드(Shengold)의 영혼의 살인(1989), 영혼의 살인 재 방문(1999)

 위의 저서들은 치료자가 우리나라 말로 번역을 해서 소장하고 있으니 치료자의 홈 페이지에 있는 전문서적 안내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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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치료 사례는 성폭행을 당한 한 중년 여성의 치료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대상:  42세의 전업 주부인 중년 부인

가족관계: 남편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있음

진단: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성폭행),

치료 기간: 1년으로 1주일에 3회씩 1 2시간씩 치료자로부터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음

 

치료의 과정

치료의 동기: 남편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있는 4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치료자를 찾아 왔다.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가? 알고 싶어서 찾아 왔다고 했다. 살고 싶은 의욕이 없고 의기 소침해서 우울하다고 했다. 부인은 옛날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지금의 자아는 진정한 자신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결혼해서 자녀가 한 명 있으나 결혼도 남편의 적극적 구혼 때문에 한 것이지 자신이 좋아서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친구 관계도 끊어져서 친구가 없고 취미 생활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전업 주부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우울증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으나 약물 치료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심리분석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심리분석 치료의 초기 단계: 분석 치료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이 표면화 되기까지를 심리분석 치료의 초반기라고 부른다. 이 때까지가 몇 개월에서 몇 년기 걸리기도 한다. 정신분석의 용어로는 치료 동맹이 형성되는 시기로 본다.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믿음과 신뢰 관계가 쌓이면서 환자는 치료자를 믿고 모든 자신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 이 치료 동맹이 없으면 치료는 없다. 치료 동맹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치료자의 공감이 필수적이다. 치료자의 공감 반응에 의해서 환자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치료자가 환자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인정해 주게 될 때 환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인정하기 시작한다. 치료자가 환자를 진실된 인간으로써 가치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에서 치료는 시작이 된다. 치료자는 환자를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인간으로써 무조건 긍정을 제공해줄 때 환자는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으로 수용하게 된다. 결국 환자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 우울했느냐고 물었을 때 초등학교 시절에는 우울하지 않았고 초등학교 때의 자아를 되찾고 싶어 했다. 치료의 동기는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되찾을 수 있는가? 였다. 부인은 지금의 자신의 자아를 싫어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떠했는가?를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과거의 역사: 부인은 초등학교 1 6년까지 반장, 부반장을 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을 역임했다. 공부도 잘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시험제도가 있던 고등학교 때는 명문여고를 다니고 있었지만 최악의 상태였다고 했다. 여고 2학년 때 자살 시도가 한번 있었고 변소 공포증이 있었다고 했다. 변소 공포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물었을 때 부인은 민망해 했다. 대낮에 여고에서 변소에 가지 못해서 변소에 갈 때는 친구 몇 명의 호의를 받으면서 변소에 갔다고 했다. 정신과에 가 보았느냐고 물었을 때 정신과에는 가지 않았고 고등학교 상담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상담을 한 결과 교회에 다녀 보라고 해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변소 공포증은 그 후에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했다. 변소에 가면 무엇 때문에 무서웠는지 물었을 때 귀신이 아니고 어떤 남성의 험악한 얼굴 모습이 떠 올라서 무서웠다고 했다. 그 얼굴의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을 때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왜 하필 변소에 가면 그 사람의 험상 굳은 얼굴이 떠 오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인의 자살 시도는 더 이상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결혼 전까지 직장 생활을 했다.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 받고 동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때 결혼 프로포즈를 많이 받았고 지금 생각하면 유능한 남자들의 구애가 많았으나 왜 자신이 거부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의 남편은 구혼 신청을 한 남자들에 비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끈질긴 구애 때문에 할 수 없이 허락을 했고 결혼 이후부터 지금까지 삶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싫어하는 자아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부인은 특별이 초등학교 시절을 강조 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가 그대로 지속 되었더라면 지금쯤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이 부인의 삶에서 전성기 였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료자는 초등학교 시절에 틀림없이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고 물었다. 부인은 특별한 것이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부터 내리막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것이 부인의 우울증의 핵심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것이 앞으로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그것이 빨리 밝혀지면 질수록 치료의 진행 속도는 빨라질 것이고 그것이 늦게 밝혀지면 질수록 치료는 늦어질 것이다고 했다. 부인이 알고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야기 하고 싶을 때 이야기 하면 되다고 했다. 강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됨을 강조 했다. 그것이 몇 주일 안에 밝혀질 것인지 몇 년 만에 밝혀질 것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빨리 밝혀질수록 좋다고 했다. 위의 분석은 치료가 시작 된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에 핵심 문제로 떠오른 것이었다.

부인은 몇 주일이 지나도록 특별히 기억 나는 것은 없다고 했다. 분석 치료는 계속해서 부인의 과거의 어린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자유 연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은 초등학교 때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고 고백을 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이벤트라고 했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 전교 부회장이었고 학급 반장으로 공부도 제일 잘했었고 키도 커서 성숙한 편이었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그 당시에 33살로 미혼이었고 과외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담임 선생님 집에서 동료 몇 명과 공부를 하면서 자고 오기도 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담임 선생님이 공부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의심을 하지 않고 믿었던 것이었다. 그 후에 담임은 방과 후에도 교실에 남게 해서 몸을 더듬거나 키스나 애무를 하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 때 부인은 담임이 자신을 사랑해서 하는 행동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성폭행인줄 모르고 있었다. 담임은 그 때 미혼으로 5학년과 6학년을 연속해서 담임을 맡아 왔었다고 했다. 문제의 핵심은 밝혀졌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것이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남편에게도 가족, 친구에게도 그 사실은 비밀로 해 왔음을 실토 했다.

치료자는 부인의 성폭행 문제가 표면화 됨으로써 부인의 여고 2년 때의 변소 공포증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부인에게 변소에서 떠 오르는 험상 굳은 남자의 얼굴은 바로 부인을 성폭행한 그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부인은 깜짝 놀랐다.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당시 여고 2학년 때 치료자에게 그 분석을 받았다면 부인의 변소 공포증은 사라졌을 것이다. 부인은 중학교에 진학 하면서 길거리에서 담임을 만날까 봐 늘 불안했고 담임을 피해 다녔다고 했다. 왜 하필 변소 공포증으로 나타난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부인은 사춘기를 중 3 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했다고 했다. 생리가 중 3 때 시작 되었고 고1, 2 때는 한창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성폭행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신체는 성폭행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을 따라서 여관에 간 기억도 있었다.

담인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많았지만 한 쪽에는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인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양심을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 후에 부인은 담임을 피해 다녔고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부인은 괴로워하기 시작 한 것이었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내 몸은 더럽혀졌다. 나는 순결을 잃었다" 등의 생각 때문에 부인은 사춘기를 혼동 속에서 보냈다. 왜 하필 변소 공포증인가? 변소에 가면 옷을 벗고 성기가 노출 되지 않는가? 사건 자체는 잊어버렸지만 매일 같이 대, 소변을 볼 때에는 성기가 노출되니까? 무의식적으로 그 사건에 연결된 것이었다. 왜 집에서는 변소 공포증이 아니고 학교에서만 변소 공포증인가? 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했으니까! 학교---담임--- 성기--- 성폭행--- 변소에서 성기 노출---얼마나 무의식의 정교한 연결인가!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 과거는 살아 있다 는 명언이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지 않는가? 부인은 치료자의 해석에 탄복했다.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부인은 사춘기 때 유사한 고통스런 경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치료에 급 진전이 이루어졌다. 부인은 언니와 함께 양철북 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도중에서 뛰쳐 나왔다고 했다. 영화 양철북의 이야기는 성폭행 당해서 사생아로 태어난 어린이가 성장이 멈춰서 나치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는 이야기이다. 성폭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부인은 깜짝 놀랐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언니가 따라 나와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부인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후에 명작 소설인 토마스 하아디의 더브빌 가문의 테스 우리나라 번역 본으로 테스를 읽다가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 책의 내용이 성폭행을 당한 테스의 불행한 삶이 묘사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부인은 성폭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TV의 채널을 돌리거나 눈을 돌려왔다고 고백을 했다.

부인의 우울증의 핵심은 성폭행 이었다. 이후부터 성폭행 상처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부인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으나 담임이 부인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분명히 부인은 성폭행 사건 이후에 지금까지 성폭행 상처의 후유증을 앓고 있음을 인정했다. 왜 부인의 삶이 억망진창으로 변했는가? 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 우수한 결혼 후보자들을 거부 했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지금의 남편보다도 우수한 결혼 구혼자들이 프로포즈를 했을 때 부인은 마음 속에 나는 처녀가 아니다, 나는 순결을 잃었다, 내가 결혼해서 신랑이 첫날 밤에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같은 수 많은 고통 때문에 그들을 거부 했다고 했다. 겉으로는 그 사람이 내가 맞지 않은 상대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성폭행 때문이었음을 고백했다. 부인은 통곡을 했다. 그 동안 억압해 두었던 모든 분노, 적대감, 미움 들이 표면화 되기 시작했다. 감정 정화가 시작되었다. 울고, 고함을 지르고 한탄을 하고 싶은 말을 싫도록 하게 했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 부회장을 했으면서도 초등학교 친구들은 한 명도 깊이 사귀는 사람이 없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친구를 깊이 사귀면 내 과거의 비밀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친밀한 친구를 사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친구를 깊이 사귈수록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다.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 성폭행 당한 사람의 공통점이 사람을 깊게 사귈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비밀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온 방어 행동임을 부인은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초등학교 6학년 당시에 부인을 성폭행 할 때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담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내 담임인 여자 선생님이 나를 가족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내 성기를 빨고 자신의 성기를 빨게 했다. 내 성기를 발기 시켜서 자신의 성기에 집어 넣게 하였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후에 성장해서 다시 성폭행의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정신분석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이 말해주고 있다. 담임은 성폭행의 피해자 였다. 그래서 자신은 페도필리아(pedophilia) 어린이 성폭행 변태 성욕자가 된 것이다. 어린이를 성폭행의 대상으로 삼은 변태 성욕자들은 어른의 성기를 보면 성 관계가 안 된다. 어른의 성기를 보면 더럽다, 징그럽다 로 느껴져 성욕구가 사라진다. 대신에 어린이들의 성기를 보면 예쁘다, 귀엽다 로 성욕구가 치솟는다. 이유는 0 5세까지 어린시절에는 어린들은 옷을 벗고 자란다. 남자 어린이, 여자 어린이들은 서로 성기를 보고 장난을 치면서 자란다. 어린이들의 성기는 익숙해져 있지만 어른의 성기를 보면 놀란다. 어른의 성기는 음모, 털이 나 있고 성기가 엄청 크기 때문에 어린이가 어린시절에 어른 성기를 보면 놀래서 성욕구가 상처를 입는다. 이 때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성숙해진 후에 어른의 성기를 보면 어린시절에 본 상처 받은 욕구가 성장이 중지되어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어른 성기를 보고 놀라는 것이다. 어린이 성기는 깨끗하고 귀엽고 예쁘게 보이는 것이다. 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린이들의 성기를 보면 흥분하지만 어른의 성기를 보면 성적 흥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성 욕구의 방출 대상으로 어린이들을 섹스 대상으로 찾는 것이다.

치료의 중반기: 문제의 핵심이 표면화 되면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시작된다. 감정을 정화 시키고, 문제를 직면하게 하고 문제를 하나 하나씩 뚫고 나가게 한다. 정면 돌파를 하는 것이다. 문제 뒤에 숨겨진 수치심, 분노, 적대감, 모욕을 받아들이고 느끼게 만들어 준다. 환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해서 감정을 대면하기를 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상처 경험과 유사한 감정을 피해왔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유사한 상처가 주는 고통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과거의 상처가 재 경험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다 새로운 경험이 첨가 된다. 단순한 과거의 상처만 재 경험하면 과거 상처의 단순한 반복이 된다. 단순한 과거의 반복은 문제를 악화 시킨다. 새로운 경험이 첨가되지 않으면 과거의 상처만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과거의 상처에 관계 된 부정적 경험과 부정적 인지 믿음을 긍정적 인지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상처의 경험을 대면하여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경험이 새로운 경험이 된다. 이후에 환자는 더 이상 과거의 유사한 경험을 피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부인은 담임 선생님이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과 성 관계를 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자 사랑의 감정이 미움으로 변했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담임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부인은 자신의 삶이 뒤죽박죽이 된 것이 분명하고 이 상처 때문에 배우자 선택에서 자신을 비하 시켰고 자신감이 망가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분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담임에 대한 분노, 미움을 카타르시스 시키기 위해서 치료자는 초등학교 때 담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으면 가져 오라고 했다. 실물이 없으니까 사진을 보면 더욱 실감이 느껴져서 분노의 표현이 많아질 것을 감안한 것이었다. 다음 주에 치료실에 온 부인은 담임 선생님과 찍은 사진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일부러 사진을 모아서 불태우거나 찢어버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을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인은 담임 선생님에게 대한 무의식적인 분노와 미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 담임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을 연달아서 담임을 했고 수학여행, 졸업 앨범, 학생회 행사 등에서 가장 사진이 많을 시기인데도 그 때 찍은 수 많은 사진들 중에 담임과 함께 찍은 사진을 한 장도 없이 사라진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사를 다니면서 한 장씩 두 장씩 부인이 무의식적으로 없애버린 것이었다.

 분노, 미움, 적대감의 방출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가자 이제는 대인관계의 문제로 패턴을 바꾸었다. 먼저 남편에게 성폭행을 사실을 알리느냐의 문제가 등장했다. 이 때 남편이 의심이 많거나 부인에 대한 불신이 많을 때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의심증이 많은 편집증적인 남편은 부인이 그러한 일이 없는 데에도 다른 남자와 관계가 있지 않았나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부인이 남편에게 영원히 비밀로 하면 남편과 부인 사이에 감정의 장벽은 영원히 남게 된다. 건강한 남편이라면 비밀을 알리고 남편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감정의 벽이 흘리면 그 만큼 서로가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부인의 경우에 남편에 대한 타진을 해 본 결과 남편은 이해해 줄 수 있다는 부인의 판단에 따라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남편은 부인이 강간을 당한 것이 아니고 성폭행을 당했음을 이해하게 했다. 부인은 순결을 잃은 것이 아니고 성기에 폭행을 당한 것이다. 강제로 성 관계를 한 것이 아니라 성기에 폭력이 가해진 것으로 성 관계와는 상관이 없음을 이해하게 했다. 최근에 많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로 이제는 강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눈에 폭행을 당했을 때 눈에 멍이 들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면 눈이 회복되면 눈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고 눈은 순수한 것처럼 성기에 가해진 폭력은 시간이 흐르면 아물게 되고 성기는 더럽혀진 것이 아니고 순결한 것과 같다는 것을 남편이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과의 감정의 장벽이 헐어지면서 부인과 남편과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고 남편에게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는 비밀이 없는 부부관계로 발전을 했다.

치료의 후기 단계: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차고 나갈 수 있게 되면 자아의 구조 변화를 가지게 한다. 내면의 자아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후에 유사한 문제나 대인관계에서 자신을 노출 시킬 수 있는가? 가 테스트를 받게 된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단점을 수용하고 통합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삶이 충만해지고 에너지가 넘치고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느끼고 매사에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한다.

부인으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가족 구원성들과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복원 시키게 했다. 자신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사실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은 이제 동료들에게도 과거의 상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갔다. 언니 가족과 관계를 회복하고 오빠네 가족들과도 관계를 회복해 나갔다. 양철북의 비디오를 다시 빌려서 이제는 중간에서 중단하지 않고 전체를 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읽다가 덮어버린 테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아무렇지 않고 테스를 독파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 친밀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갔다.

상처에서 빠져 나오면서 부인은 옛날에 하고 싶어했던 공부를 다시 계속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가난해서 취직을 해야 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이제 다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은 다시 방송 통신 대학에 진학해서 다시 새로운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에 사장해 두었던 자신의 재능을 다시 가동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방송 통신 대학에 합격을 했고 그 과정을 잘 따라갈 수가 있었다.

 부인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전문 직종으로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성적인 문제를 상담해 주는 상담 심리전문가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 하에서 열심히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간혹 신앙 간증회나 청소년 모임 등에서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 성폭행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문제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부인은 과거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양을 탈을 쓴 이리의 모습을 보고 자신 있게 당신의 성 욕구 충족의 대상물이 된 내가 지금 어떻게 어려운 삶을 살아 왔는가? 얼마나 당신이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 시켰는가? 내 삶이 얼마나 많이 망가졌는가?" 를 말하고 싶어했고 만날 수 있는 용기 생겨났다고 했다. 그 담임 선생님은 그 후에도 성폭행 사건이 몇 건 있었고 현직에서 쫓겨나서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어 포기 했다.

 부인은 이제 우울증에서 벗어나서 당당하게 열심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일할 전문 분야를 다시 찾고 가족들과의 화목을 다시 회복하고 자녀 교육에 열성을 보이고 친구들과 친교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친지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서로 왕래가 잦아지고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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